[이강재의 임상8체질] 崔麟은 少陰人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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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崔麟은 少陰人이 아니다
  • 승인 2020.11.28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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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28

나는 1949년에 반민특위(反民特委)1)가 좌절된 것이 우리 민족사의 중대한 실패요 과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일파라 불리는 사람들을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나는 8체질론에 따라 사람을 분석하는 학인(學人)이다.

 

(1) 최린이 쓴 약력

1962년 8월에 나온 『한국사상(韓國思想)』 제4집과, 1971년 7월에 나온 『여암문집(如菴文集)』 상권(上卷)에 실린2) 최린(崔麟)의 자서전(自敍傳)은, 최린이 남긴 자필 원고3)인 약력(略歷)4)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1878년 출생부터 49세가 되던 1926년에 세계유람에 나서던 때까지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다.

 약력이 작성되던 시기를 최린은 ‘기미년(己未年)으로부터 30년이 경과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아마도 1949년 4월 20일에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가 아닌가 짐작한다. 아울러 이 글은 3.1운동의 배경에 관하여 중점적으로 쓰려던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한다.

 

(2) 체질과 감별

어떤 한 사람의 ‘체질(體質 constitution)’을 말한다면 말하는 순간, 해당하는 ‘체질’ 명칭에 그 사람에 대한 특징정보가 모두 실리게 된다고 볼 수 있다. 8체질론에 관한 개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8체질로, 태소음양(太少陰陽)으로 구분하는 사람이라면 사상인(四象人)으로, 각각 구분된 카테고리를 자신이 갖고 세운 개념에 따라 그 사람을 상상(想像)하게 될 것이다.

체질감별이라는 절차(節次)도 그렇다. 의사가 채택한 감별도구를 통해서 환자의 체질을 감별하는 때에도 그가 가진 개념이 작용한다. 그의 개념(槪念)이란 상상이며 기억(記憶)이고 환자의 몸을 통해 감별하는 행위는 현실이다. 이 두 가지의 결합으로 감별(鑑別)이 완성된다.

1898년에 함흥에 있던 보원국에서 (스물한 살의) 최린을 만난 (예순둘이던) 동무(東武) 공(公)은, 맥(脈)을 잡고 팔다리와 피부를 만졌다. 그런 후에 시구(詩句)를 쓰게 하고 글씨를 살폈다. 마지막에는 앞뜰에 나가서 장작을 옮기게 하고 관찰했다. 이런 절차 후에 동무 공은 자신이 세운 개념에 따라 최린을 소음인(少陰人)이라고 판정했다.

이 일화(逸話)를 ‘여러 가지의 체질 판단 행위’라고 받아들이는 경우5)도 있다. 1898년은 동무 공이 작고하기 2년 전으로, 1894년에 갑오본(甲午本)을 완성한 후에 《수세보원(壽世保元)》을 개초(改抄)하던 시기이다. 병증론(病證論)의 소음인편은 이미 갑오본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동무 공이 최린을 판단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동무 공은 헷갈렸던 것이다. 그래서 글씨를 쓰게 하고 장작을 나르게 했다고 본다.

 

(3) 구체적이며 담백함

최린은 소음인 향부자팔물탕(香附子八物湯)으로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았던 병에서 벗어났다. 사상방(四象方)에 감동하였다.6) 최린은 당시의 상황을 있던 그대로를 보이듯이 구체적이면서도 담백하게 서술했다. 글에 자신의 감정상태를 전혀 개입시키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신기했다 놀라웠다 의심스러웠다 힘들었다 같은 표현 말이다.

그리고 최린은 자신이 앓은 병증이 어떠했는지 밝히지도 않았다. 다만 병이 나았다고만 했다. 설사 핵심적인 내용만 간단하게 쓰려는 글이라고 하여도, 언제 어떤 이유로 인해서 (원인이 분명하지 않다면 추측으로라도) 어떤 증상으로 어떻게 불편했고 어떠한 고생을 했다는 정도는 설명하는 것이, 치료의 결과를 더 도드라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목음체질(木陰體質 Cho.)7)인 나는, 이런 내용으로 글을 쓴다면 연유(緣由)와 상태 그리고 과정도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결과만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최린은 나와는 다른 체질일 거라는 짐작이다. 소음인 향부자팔물탕이 잘 작용했다면 최린의 병은 아마도 울증(鬱症)이었을 것이다.

 

(4) 소음인 최린

동무 공은 최린을 소음인으로 판정하고 처방을 했고, 그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 병이 치료된 것은 결과적으로 팩트(fact)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의 제목에 ‘최린은 소음인이 아니다’라고 걸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동무 공에 대한 도발(挑發)은 아니다.

내가 받은 일반적인 정규교육과정을 통해서, 최린을 ‘민족대표 33인이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이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의사가 되고 사상의학을 공부하면서 소음인이라는 정보가 추가되었다. 나와 비슷한 정보습득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사상의학가(四象醫學家)들도 ‘소음인’이라는 정보를 통해서, 혹시 최린을 ‘나약(懦弱)한 변절자’로 재단(裁斷)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소음인 최린’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5) 최린이 소음인이 아니라면

나는 지난 〈1257호〉에 실은 「東武 公의 親筆」을 준비하면서 최린과 연관된 자료를 찾다가 그가 소음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5세 때 비밀결사조직인 활빈당(活貧黨)과 혁명단체 성격의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한 적이 있을 정도로 야망이 큰 활동가였다. 또한 그가 속한 집단에서는 언제나 의협심이 강한 리더였다. 1907년(30세)에 일본유학생회 회장일 때, 조선을 굴욕적으로 표현한 국화전시회장(菊花展示會場)을 유학생들을 이끌고 습격하여 부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런데 경영난에 처한 보성학원(普成學園)을 맡아서 관리(학교장)도 하고 보성전문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던, 34세(1911년)부터 10년간 교육가(敎育家)의 생활은 ‘건조무미하고 적막’하였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의 풍모로부터 상대의 사람됨을 알아내는 직관력이 있다. 약력에 메이지대학 졸업성적이 신통치 않았음을 공개적으로 적었다. 또한 1910년에는 답답한 시국을 걱정하던 동지들과 서울에 있는 각국 공관에 불을 놓아 국제문제를 일으키자는 모의가 발각되어, 체포되어 남부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을 때도 이를 감추지 않고 진술할 정도로 솔직하고 당당했다. 그리고 명분이 있는 일에는 분연(憤然)히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의 배경과 결과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돋보이게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고 담백한 서술(敍述)로 일관하였다.

동무 공은 최린의 필체(筆體)를 살폈다. 나는 최린의 문체(文體)를 보았다.

 

(6) 금음체질

8체질 중에서 금음체질(金陰體質 Col.)은 사상인 분류로는 태양인인데 소음인인 수양체질(水陽體質 Ren.)과 닮은 면이 있다. 내장구조(內臟構造)로 보아 그러하다. 금음체질의 내장구조는 강(强)한 장부(臟腑)로부터 [金>水>土>火>木]의 순서이고, 수양체질은 [水>金>木>火>土]의 순서이다. 금(金 肝膽)과 수(水 腎膀胱)가 강한 장부이고, 화(火 心小腸)가 약(弱)한 장부인 것이 비슷하다.

동무 공이 새로 만든 태양인(太陽人) 처방은 아주 단촐하다. 미후도식장탕(獼猴桃植腸湯)과 오가피장척탕(五加皮壯脊湯) 단 둘이다. 태양인 약재도 20개 남짓이다. 그래서 처방의 부족함을 느낀 사상의학 임상가들은 저마다의 방법을 모색하곤 한다.

1997년부터 사상방을 운용 중인 나는 의도적으로 금음체질 환자에게 소음인 처방을 투여한 적이 많다. 특히 소음인 울광증(鬱狂症) 처방인 팔물탕류(八物湯類)를 많이 썼다. 왜냐하면 이 처방이 금음체질과 닮은 수양체질에게 적용될 수 있는 처방이기 때문이다. 투약의 결과도 괜찮았고 패증이 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린의 병은 울증이었다. 그리고 수양체질에게 적용되는 향부자팔물탕으로 약효를 나타낼 수 있는 금음체질이었다. 이것이 내 궁리(窮理)의 결과다.

 

※ 참고 문헌

1) 『韓國思想』 4집 한국사상강좌편집위원회 1962. 8.

2) 『如菴文集/上』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 7. 14.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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