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東武 公의 親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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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東武 公의 親筆
  • 승인 2020.10.27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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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26

이번 글은 ‘8체질의학 공부’라는 칼럼의 주제와는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선대(先代)에서 남긴 자료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말하려고 하므로, 공부하는 태도와 자세에 관한 글이라고 받아주면 좋겠다.

 

(1) 최린

1878년에 함흥에서 최덕언(崔德彦)의 외아들로 태어난 여암(如菴) 최린(崔麟)은, 1904년(27세) 7월에 도일(渡日)하여 1909년 7월에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한다. 귀국하여 1910년(33세) 10월에, 일본에서 안면이 있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한다. 의암이 서거한 1922년 5월 19일 이후에는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천도교 내에서 활동하면서 1947년(70세)에 대법사에 오른다.

기미년(42세)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3.1독립만세운동의 세부적인 계획과 교섭, 실행을 맡았었다. 1934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가 되었고, 1937년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전보국단 단장에 취임하는 등 친일파로 변절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한국전쟁이 나고 1950년(73세) 7월 14일에 납북(拉北)되어 195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2) 보원국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공(公)은 1898년 4월 13일에, 17개월간 재직했던 고원군수(高原郡守)에서 물러나 함흥 시내 만세교 부근에 보원국(保元局)을 열고 있었다. 신병(身病)으로 신음하고 고통을 겪던 스물한 살의 최린은 1898년에, 당시 함흥 인근에서 명성이 높았던 동무 공을 찾아가서 진료를 받는다.

동무 공은 태소음양(太少陰陽)을 감별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맥을 잡아본 후 팔다리와 피부를 만져보았다. 그런 후에 종이와 붓을 주면서 시구(詩句) 몇 구절을 쓰라고 한 후에 글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지막에는 앞뜰에 나가서 쌓여있는 화목(火木) 장작을 두 번 왕복하면서 나르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시험한 후에 소음인이라고 하면서 향부자팔물탕(香附子八物湯) 처방을 써서 주었다. 최린은 그 처방약을 먹은 후에 살아났다는 것이다.

최린은 이 내용을 스스로 쓴 약력(略歷)에 담아두었는데,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에서 1971년 7월에 발간한 『여암문집(如菴文集)』 상권(上卷)에 실려 있다. 그리고 편찬위원장이었던 한의사 주동림(朱東林)이, 동일한 내용이 1971년 7월 15일에 나온 『한의학(漢醫學)』 제37호에도 실리도록 하였다.

최린은 아래와 같이 썼다.

以上의 處方과 訓話는 「東武」 先生께서 나에게 친히 주신 바인데 先生께서 나의 爲人과 性格을 거울과 같이 디려다 보시고 나의 修養과 장래 事業을 爲하여 주신 戒銘이었다. 그 후 나는 先生의 이 處方에 의하여 不治의 病이 完治되었다.

 

(3) 처방이 들어 있는 사진의 구성

아래에 보이는 사진이 최린이 동무 공으로부터 받은 ‘처방과 훈화’이다.

 이 자료는 중간에 표시한 청색 선을 기준으로 종이 두 면(面)에 적힌 것을 하나로 합친 것으로 판단된다. 구성은 세 부분으로 (그림에서처럼) 보라색(處方), 주황색(訓話), 적색(附記)의 박스로 나눌 수 있다. 1)

 

 

1) 처방(보라색 박스)

향부자팔물탕 내용이다. 전체 처방을 적은 후에, 백하수오는 인삼으로 대신할 수 있고, 관계(官桂) 1돈을 추가할 수 있다고 보충하여 적어 넣었는데 글씨의 굵기가 다르다.

2) 훈화(주황색 박스)

금기(禁忌)와 소희(所喜)를 각각 나열한 후에, 희락지심(喜樂之心)을 경계(警戒)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3) 부기(적색 박스)

‘右東武親書 傅余者也’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부분은 동무 공이 친히 써서 내게 주신 것이다’라고 풀 수 있다. 스승 격(格)인 분이 주신 것이므로 줄 부(付)가 아니라 스승 부(傅)를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최린이 동무 공에게서 처방전을 받은 당일에 쓴 것이 아니라, 이 문서의 성격을 표시할 목적으로 나중에 적어 넣은 것이라고 짐작된다.

 

(4) 처방전 자료의 출처

최린이 이 자료의 훈화 부분과 동일한 내용을 필사한 다른 문서가 『여암문집』 상권의 면지(面紙)로 앞과 뒷표지 안쪽에 동일하게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설명으로 “面紙는 先生이 筆寫한 東醫壽世保元에 써 넣어준 東武 李濟馬 先生 親筆”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여암문집』 편집진이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범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동무 공의 친필이 들어 있던 처방전도 최린이 그런 식으로 자신이 필사한 동의수세보원2) 안에 함께 보관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5) 친필이라는 의견

이 처방전 사진자료가 언제 한의학계에 알려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주동림이, 『여암문집』의 내용이 『한의학』 제37호에 실리도록 제공하였던 1971년에 함께 공개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상의학을 공부하고 관심을 둔 대다수의 후학들은 『한의학(漢醫學)』 제37호에 실린 내용과 함께, 사진자료에 부기된 오른쪽(右)을 ‘오른쪽 모든 내용’이라고 받아들였다.

1977년에 나온 이을호와 홍순용의 『사상의학원론』에 사진이 들어 있고, 1991년 2월에 나온 박인상의 『동의사상요결』 면지에는 ‘동무 이제마 선생 친필 처방전’이라고 되어 있다. 1995년 9월에 나온 『WIN』 4호에 ‘역사인물 탐구 이제마’ 기획기사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이제마의 친필로 경희한의대 송일병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2000년 10월에 나온 김달래의 『이제마가 분석한 명인들의 사상체질』에서도 ‘최린에게 써준 이제마의 글씨’라고 사진 설명을 붙였다.

 

(6) 문제 제기

대한사상의학회 회장을 지냈던 최병일은 2000년대 초반에, 1962년 8월에 발간된 『한국사상(韓國思想)』을 입수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1971년의 내용과는 다른 부분을 발견했던 것이다.

『여암문집』에는 “비로서 소음인으로 판정하시고 다음과 같이 처방과 훈화를 즉석에서 선생이 친히 쓰시어 나에게 주시었다”로 되어 있는데, 『한국사상』에는 “비로소 少陰人으로 判定하시고 左와 같이 處方과 訓話를 즉석에서 先生이 부르시고 내가 받아쓰고 하였다”로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병일은 『한국사상』이 연대가 더 빠르므로, 이 처방전의 내용 전부는 동무 공이 부르는 것을 최린이 받아 적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이경성에게 밝혔다. 이경성은 처방전의 필체가 최린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김달래로부터 전해 듣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경성도 2003년 9월에는 최병일의 견해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7) 동무 공의 친필

무엇이 팩트(fact)일까. 상식선에서 보자.

최린이 한학(漢學)에 능하다 하더라도 의학적 지식이 없는 환자에게 자신이 주는 처방전을 대신 쓰라고 불러주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한약 처방을 쓰는 의자(醫者)는 평소 손에 익은대로 흘림체로 금방 쓱싹 쓰면 되기 때문이다.

훈화는 환자인 최린이 명심해야 하는 내용이니까 듣고 쓰면서 잘 새기라고 차근차근 불러주었을 것이다. 그것을 듣는 최린은 동무 공의 말을 따라가야 하니 속도를 내어서 받아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부기는, 이 처방전 문서의 성격을 표시하기 위해서 나중에 작은 글자로 차분하게 적어 둔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즉, 우(右)는 처방전 사진자료의 오른쪽에 위치한 향부자팔물탕 내용이다. 그것은 동무 공이 친히 쓴 것이다. 그런 후에 훈화 부분을 최린이 받아 적었다. 그런데 최린은 소음인이 맞을까.

 

※ 참고 문헌

1) 『如菴文集(上.下)』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 7. 14.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3) 역사인물 탐구 이제마, 『WIN』 통권 4호 1995. 9.

4) 이경성, 「東武 李濟馬 親筆에 對한 參考資料」 2003. 9. 21.

5) 이제마 선생이 최린에게 준 향부자팔물탕 처방전, 유준상 『한의신문』 2020. 7. 23.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자료에 대한 설명의 필요에 따라 내가 임의로 색상으로 선과 박스를 표시하였다.

2) 최린은 1903년에 친구 한석교(韓錫敎)와 함께 사상의학을 연구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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