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지산겸- 출발선이 다른 것에 대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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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지산겸- 출발선이 다른 것에 대한 인정
  • 승인 2020.07.17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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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박혜원
장기한의원

‘자기 PR 시대’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 얼추 20년 정도는 된 것 같다. 그 이전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의 시대였다면,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난으로 취업문이 좁아지자 ‘남들과는 다른 나’를 주장하는 것이 곧 생존의 스킬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높이는 겸손이라는 미덕은 설 자리가 무척 좁아 보인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덕목인 만큼 주역에도 겸손과 관련된 괘가 있다. 지산겸괘다. 지산겸 괘의 괘사는 이렇다.


謙 亨 君子 有終

 

괘사는 이렇게 단촐하나, 단전에는 설명이 꽤 길다.

 

彖曰 謙亨 天道下濟而光明 地道卑而上行 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人

道惡盈而好謙 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

 

길게 썼지만 겸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다. 넘치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채워지는 상황, 그것이 謙이라는 것이다.

 

初六 謙謙君子 用涉大川吉

 

보통의 초육은 가장 힘이 없는 자리이다. 심지어 제 짝인 육사와 음양응이 되지 않아 비빌 언덕도 없는 상태다. 그런데 애를 써서 큰 내를 건너도 길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초육이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힘이 없어 가장 아래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군자의 몸으로 가장 아래에 처하기를 자청한 사람이다. 언제든 다시 저 위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겸손하고 겸손한 그는 자신의 넘치는 것을 덜어 가득 차 있지 않은 것을 채우려고 가장 낮은 곳으로 왔다. 그러니 큰 내를 건너도 길하다.

 

六二 鳴謙貞吉

 

명성은 흔히 독이 된다. 그릇에 맞지 않는 지위나 재물을 가져오기도 하고, 소중하고 평범했던 일상을 앗아가기도 한다. 육이는 겸손하다고 이름난 사람이다. 그를 따르는 사람도, 그의 명성에 기대려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이는 언제나 정도를 지킨다. 더 위로 올라가려는 욕심도, 이름을 더 얻어 칭송받고자 하는 욕구도 없이 제 자리를 지킨다. 그러니 길하다.

 

九三 勞謙 君子有終 吉

 

일을 하면 성과가 있는 것이 좋고, 그 성과가 좋은 평가를 받으면 더할 나위 없다. 마지막이 잘 되었을때 여럿이 그 일을 해냈다면 아무래도 공과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마련이다. 가장 많이 수고를 한 사람에게 그 영광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뒤의 숨은 조력자들은 그 영광에 가려지게 마련이다. 나는 구삼의 겸손함은 나눔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제일 많이 일했으니 그 열매는 내가 몽땅 가지는 게 맞다는 생각 대신 조력을 아끼지 않은 이들과 그 공을 나누며 마침이 있도록 끝까지 함께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그것이 구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겸손일 것이다.

 

六四 無不利撝謙

 

지산겸 괘의 효사들은 흉한 것이 없다. 그러나 내괘의 효사들이 전부 길하다 한 반면에, 외괘의 효사들은 잘해야 無不利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겸손의 자세,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데도 이롭다, 도 아닌 이롭지 않을 것은 없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겸손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육사부터는 사람으로 따지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행복한 부분을 포장하여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가진 것을 누리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그러나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깔아보는 것은 다르다. 나는 가졌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그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헤아리는 것이 육사의 겸손이다. 이 정도는 다 가질 수 있는데 노력하지 않으니 못 가지는 것이라는 식의 태도는 겸손이 아니며, 결국은 가지지 못한 사람과의 불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가진 자로서 아량과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이롭지 않을 것은 없다.

 

六五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無不利

 

利用侵伐은 征不服也, 즉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전쟁에는 돈이 든다. 누군가를 무릎 꿇리려면 그만한 권세와 재력이 있어야 한다. 不富以其鄰은 그 재물을 이웃의 피눈물로 쌓아올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식민지를 만들고 거기서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하는 일이 고작 한 세기 전까지 국력 부강의 가장 좋은 대책이었다. 지금도 명목상의 독립 국가가 얼마나 많은가. 거대 자본이 망가뜨린 사람과 생태계가 얼마나 많은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차라리 어느 나라의 속국이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썩을 대로 썩어 더 이상 손 댈 수 없는 처지의 나라 사람들이 할 법한 일이다. 만약 이웃 나라가 그런 곳이라면 그곳을 정벌하여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육오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효사에 모두 등장하는 謙이 없다는 것이다. 육오는 겸손하지 않아도 되는걸까? 육오는 왕의 자리이니 겸손 같은건 필요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利用侵伐은 겸손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전쟁을 예의 차려서 하던가. 당신들 군사 수가 우리보다 적으니 우리가 몇 수 접어 드리지요, 하고 시작하는 전쟁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효사가 지산겸 괘의 다섯번째 효에 자리하고 있는걸까? 그건 단전에서 이야기한 ‘위에서부터 아래로 건너가는’, ‘넘치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는’ 행위가 육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이 나을 정도의 상황이면 백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닐 것이다. 새 영토로 편입된 그곳 사람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잘 살고 있던 이 나라에서 그 지역으로 도움을 준다면 비록 나라를 빼앗겼다 하더라도 민심은 이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길하거나, 형통하거나, 바르지 않다. 그저 ‘이롭지 않은 것이 없을’ 뿐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몇몇 사람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이 정말 조선을 새 영토로 삼아 자국민과 똑같이 대우하고 경제가 발전하도록 도와줬다면, 그래서 민심이 일본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면, 지금 내가 쓰는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게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上六 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鳴謙은 육이에서도 등장하고 상육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둘의 상황은 약간 다르다. 상전에서는 상육의 鳴謙은 志未得也, 뜻을 아직 얻지 못함이라고 한다. 육이에서는 中心得也, 중심을 얻었다고 했다. 그 다음이 더 아리송하다. 可用行師 征邑國也. 뜻을 아직 얻지 못했으니 군사를 써서 읍국을 정벌할 수 있다니. 언제나 그렇지만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보도록 한다.

상육은 구삼의 짝이다. 구삼은 수고해서 일하고도 겸손한 사람이라고 했다. 상육은 그런 자기 짝의 겸손함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자기 짝의 겸손함을 소문내는 행위 자체도 겸손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하물며 군사를 써서 읍국을 정벌하는 것은 利, 그야말로 이로움을 탐하는 행위라 겸손과 또 거리가 멀다. 그러니 수고한 것은 그저 그대로 두고, 일이 마쳐지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구삼의 뜻을 상육이 얻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짝이 허락하지 않으니 군사를 크게 끌어모아 커다란 나라를 징벌하고 왕좌에 앉을 수는 없다. 그저 그 욕심이나 한 풀 꺾일 수 있도록 작은 마을 하나 정도를 다스리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주역이 말하고자 하는 겸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나를 낮추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가졌다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고, 내가 높다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낮은 곳에 처하는 사람이 있다. 겸손은 나의 자리를 돌아보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남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내가 가진 것으로 채워주려는 능동적 노력이다.

그러나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빼앗겼다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인천공항공사의 보안검색요원 비정규직을 직접 고용하겠다는 말에 취업준비생들이 역차별이라며 반발했다는 기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그 ‘취준생’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일자리도 아니었다. 이미 내 것도 아닌 그 일자리가, 이미 그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처우가 바뀐다고 해서 영영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빈 자리’를 보아 ‘너의 채워진 것’을 깎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니 이건 지산겸 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가도 너무 많이 갔다. 나의 가진 것은 온데간데 없고 나의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이 시대는 참 아득한 결핍의 시대로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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