保元契의 五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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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元契의 五人 (2)
  • 이강재
  • 승인 2020.05.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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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16

李鎭胤 선생

1894년생인 李鎭胤 선생은 쉰 살이 될 때까지는 사업을 하느라고 집 밖으로 떠돌았다. 長箭에서 광산 사업도 하고 건축 일도 했다. 홍순용 선생이 1940년에서 1943년 사이에 함경도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만난 적이 있다. 1941년에 東武 공의 장남 龍海 氏가 가지고 있던 甲午舊本 원고 두루마리를 빌려서 韓敏甲을 시켜서 筆寫를 하게 해서 가졌다. 이진윤 선생은 그때는 사상의학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서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필사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외지에서 사업을 했으니 당연히 함흥 鄕校의 典校로 있던 韓斗正 선생과도 교류가 없었다.

해방이 된 후에, 1947년 3월에 월남을 해서 서울에 왔다. 생활이 어려워서 전농동 청량리 창신동 광희동 등으로 거처를 옮겨서 살았다. 그리고 1년 정도 후에 방산시장 주교초등학교 앞에 保元局을 열었다. 보원국은 함흥에서 동무 공이 하던 약방 이름이다.

6.25가 터지기 얼마 전에 홍순용 선생이 찾아와서 보원국에서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四象醫學을 배우겠다고 온 것이다. 그러다 전쟁이 났는데 미처 피난을 못 가고 있다가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 동대신동에서 보원국을 하다가, 1953년에 서울로 올라와서 종로구 원남동에 다시 보원국을 열었다. 그랬더니 다시 홍순용 선생이 찾아왔다.

홍순용 선생을 만난 후에 이진윤 선생의 가족은 복음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보원국에는 복음교회의 방림한 장로도 함께 있었는데, 그는 함경남도 영흥 사람으로 일제 때 교회일로 함경도 지역을 많이 왕래했었다. 홍순용 선생은 찾아와서 동무 공과 집안에 관한 얘기를 자세하게 물었다. 1941년에 필사한 갑오구본을 보고가기도 했다. 이진윤 선생은 1961년에 별세할 때까지 보원국을 경영했다. 享年 68세이다.


朴奭彦 선생
박석언 선생은 1914년에 함흥시 상수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살림에 여유가 있었다. 방앗간도 하고 과수원도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YMCA 계통에서 활동을 했다. 박석언 선생은 1943년이거나 1944년 무렵에 韓斗正 선생에게서 사상의학을 배웠다. 그리고 松鶴이라는 號도 받았다. 호는 나중에 松皐로 바꾸었다. 함흥에 있을 때부터 의료행위를 했는데 양의도 하고 한의도 한 것 같다. 집안에 의료시술기구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 1946년에 혼자서 越南했다. 그런 후에 가족들은 1.4 후퇴 때 내려왔다. 선생은 월남을 해서 신당동에 신생의원을 열었다. 전쟁이 나자 거제도로 가서 함흥사상의원을 했다. 서울에는 1954년인가 1955년쯤에 복귀했고, 한의사면허(면허번호 532)를 받은 후에 창신동 오가주다리 근처에서 삼동한의원을 했다. 근처에 尹完重의 信一한의원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李賢在 선생이 주도하던 사상의학회에서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970년에 대한사상의학회가 출범할 때 참여했다. 신일한의원 윤완중, 영등포의 장세홍, 의성에서 한약방을 하던 이제헌, 대전 국제한의원의 노을선 등과 친했다. 대한사상의학회의 초창기에는 박석언 선생의 한의원에서 모임을 가지다가, 나중에 홍순용 회장이 신당동으로 한의원을 이전하여 홍순용한의원을 열고부터는 그곳에서 학술모임을 가졌다.

동무 공의 역작인 『격치고』를 번역해서, 1985년 10월에 사비를 털어 출판했다. 서문을 써준 崔世祚 씨는 박석언 선생과 이종사촌 간이다. 許燕 원장이 이끌던 화요학회에도 자주 가서 강의를 하곤 했다. 1988년 10월에 別世하였다.

 

李賢在 선생

1959년 12월 16일에 행림서원에서 간행한 『동의수세보원』에는 동무 공과 관련한 출판본으로는 최초로 동무 공의 肖像이 들어 있다. 이 초상은 함흥의 栗洞契에서 제작한 것으로 이현재 선생이 율동계 門人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廉泰煥 선생이 전하기를, 이현재 선생은 남대문로에 있던 四象會館의 자신의 방에 이것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동양의대에 다니던 시절에 염태환 선생은, ‘사상회관에 들르면 이 초상이 가장 갖고 싶었다’는 것이다.

 

李聖洙 氏와 홍은표 氏

李鎭胤 선생의 아드님인 李聖洙 씨는, ‘아버님께서, 李賢在 씨가 고원 할아버지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데 어떤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걱정을 하셨다’고 하였다. 이진윤 선생은 이현재 선생과는 교류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 保元契가 서울에서 조직되었다는 말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 명단에 아버님 함자가 들어간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진윤 선생은 1947년 이전에는 서울에 거주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방향을 바꿔서 홍순용 선생이 함흥에 와서 보원계에 가입했다는 것도 넌센스라고 했다. 더구나 홍순용 선생이 함흥에서 이진윤 선생에게 배웠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면서, 최소 몇 달은 거처를 두고 거주했을 텐데 그런 일은 모른다고 했다.

韓斗正 선생은 유학자고 이진윤 선생은 사업을 했다. 동향 사람이라고 해도 만날 일이 없다. 서로 교류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함께 보원계를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진윤 선생은 젊어서는 사업을 하느라고 거의 집에 없었다. 50세가 넘어서 집에 왔다는 것이다.

洪淳用 선생의 장남인 홍은표 씨는, ‘아버지께서 함경도에 계실 때 교인들이 아프면 아버지가 소음인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당시에 『동의수세보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이성수 씨는, ‘함흥에서는 집안의 가정주부도 四象醫學 지식을 알 정도로 그런 지역 분위기가 있었다.’면서 선교활동을 위해서는 그 지역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하니 그 정도의 지식을 갖췄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는 의견을 주었다.

홍은표 씨는 將軍 출신답게 ‘보원계가 만일 있었다면 아버님이 가입을 하는 것은 가능할지는 몰라도 아버님이 주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 같다.’며 부친의 일인데도 당당하게 객관적으로 의견을 표시했다. 결정적으로 “홍순용 선생은 1941년에 明川에 있었다.”면서 1941년에 서울에도 함흥에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戰後에 이현재 선생의 四象醫藥普及會와 교류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韓斗正과 7版本

한두정 선생은 율동계에 의한 初版 발행 이후, 이어진 동의수세보원의 출간 정보에 대해서 모두 꿰뚫고 있었다. 아마도 판본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동의수세보원의 출판 이력을 정리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1940년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서 교열을 맡은 한민선과 함께 역사적인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을 편집하고 保元契란 이름으로 1941년에 발간했다. 栗洞契 門人 7인의 이름을 辛丑本에서 밝혔듯이, 7판을 엮은 보원계의 이름으로 자신과 한민선의 이름을 함께 넣었다.

출판과 관련한 편집 교열 작업은 거의 함흥에서 이루어졌고, 京城府에는 출판허가를 받으러 다녀갔을 것이다. 그런 후에 인쇄는 大田府에서 하였고, 咸興에서 金重瑞方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배포되었다. 『동의수세보원』이 함흥에서 자주 출간된 것은, 동무 공의 고향이기도 하고 함흥은 家庭의 부인조차도 사상의학적인 지식을 갖추었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이 지역에서 수요가 높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保元契의 五人

이상의 글을 통하여, 保元契란 실체는 있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韓斗正과 韓敏善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는 것을 밝혔다. 즉 洪淳用 선생과 李鎭胤 선생은 보원계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순용 선생은 왜 그렇게 한 것일까? 보원계의 인물 다섯 명을 고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것을 궁리해 보았다.

아마도 홍순용 선생은 윤완중이 1963년에 펴낸 판본을 보았을 것 같은데, 7판본에서 保元契를 알았고, 韓斗正과 韓敏善의 이름을 확인했다. 한두정은 編輯, 한민선은 校閱이라고 7판본에 明記되어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반드시 넣어야 한다.

홍순용 선생은 사상의학계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고 싶다. 그렇다면 우선 학문적인 血統이 좋아야 한다. 한두정 선생에게 배웠다고 공개적으로 廣告하는 박석언을 보라. 그래서 한두정이라는 인물과 보원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사상의학계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원계에 들어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제 보원계에 홍순용을 넣어야 한다. 홍순용 선생은 1940년에서 1943년 사이에 함흥 지역에 가서 사상의학과 관련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진윤 선생과 그때 안면을 텄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 이진윤 선생에게 사상의학을 배우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두정 선생을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한두정, 한민선 두 사람에 자기 혼자만 끼어들면 남들이 수상하게 볼 것이다. 이진윤 선생은 이제마 공의 집안사람(從孫子)이고 자신에게 사상의학을 전수해 준 분이니 넣어드린다. 6판본을 북경에서 펴냈다는 한병무는 율동계 문인이었던 한직연의 아들이라고 하니, 구색 맞추기 삼아서 그도 넣는다.

이진윤 선생에게 배울 때, 동무 공의 집안에 대해서 각별하고 자세하게 물었다. 族譜를 보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현재 선생이 가지고 있는 자료도 요청해서 보았다. 자신과 각별한 사이인 권도원이 이현재의 수제자가 아닌가. 그리고 1964년에 자신이 열심히 공부한 국사 지식을 버무려서 ‘동무 이제마전’을 쓴다.

이제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을 적당한 곳을 고르면 된다. 글의 말미에 자신이 조합한 인물과 자신을 보원계에 끼워 넣는다. 그런 후에 자료를 제공한 이현재 관련 자료를 덧붙여서 예의를 차린다. 1964년에 그 분은 아직 별세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동무 이제마전’을 『대한한의학회보』에 발표한 시점이 1964년으로, 이진윤 선생이 1961년에 作故한 이후이다. 그러니 이진윤 선생이 보원계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증언을 할 수가 없다.

魯堂 韓秉武는, 1926년에 作故한 율동계 문인 韓稷淵의 長男이다. 7판본에, 1936년에 北京에서 6판본을 발행한 인물로 등장한다.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식솔들을 데리고 滿洲로 이주하였다고 하니, 이분 또한 보원계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증언을 하기가 어렵다.

판은 짜였다. 이제 홍순용 선생 혼자서 우기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강재 / 임상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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