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난 중국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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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난 중국과 일본
  • 승인 2020.04.17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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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식

신민식

mjmedi@mjmedi.com


신민식 병원장의 한의사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②

선친과 작은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을 밝혀나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선친의 유서인 월남유서와 그동안 모아 온 집안의 독립운동 자료를 복사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하는 것이었다. 20184월 정식으로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했다. 국가보훈처의 판단은 보류였다. 확보한 독립운동 자료에 당시 이름과 행적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유서의 내용은 맞지만 이를 정확하게 뒷받침할 자료가 없기때문에 보류되었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집안의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사진1.신민식 병원장(가운데)이 일본 탐방 중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1.신민식 병원장(가운데)이 일본 탐방 중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우선 작은할아버지인 신홍균 선생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행적이 서술되어 있는 동승촌사활이라는 책을 참고해 중국으로 향했다. 동승촌사활은 중국 목단강에 있는 동승촌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정리한 책이다. 동승촌을 찾은 때는 2018년 가을이었다. 독립운동의 산실인 동승촌에 왔다는 생각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일주일 넘도록 주민들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승촌사활 저자들의 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많은 질문을 했지만 아쉽게도 그분들은 남편들이 책을 썼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동승촌은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인 만큼 보다 공식적인 문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살펴본 자료는 공산당 기관지였다. 이를 살펴보

사진2.일본 헌병일지 목록.
사진2.일본 헌병일지 목록.

니 동승촌사활에 서술되어 있는 독립운동 활동은 있었으나 정작 작은할아버지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중국을 두 번 더 방문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로 인한 실망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목단강 일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주다. 만주는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역사적인 장소에서도 신홍균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의아했다.

그렇게 지쳐가던 와중에 중국의 역사적 배경으로 신홍균 선생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알게 됐다. 첫 번째는 공산당 당원이 아니기 때문에 공산당 기관지에 기록이 없을 가능성, 두 번째는 중국이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당시 적대 관계였던 한국의 항일운동 기록은 그 자체로도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어 불태워진 시대적 배경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오히려 의욕을 키울 수 있었다. 내가 아니면 선대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때부터 우리나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관한 고서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중국 문헌은 물론 항일운동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을 일본 문헌까지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대진단과 원종교에 관련된 논문에서 인용된 일본인이 쓴 책인 조선의 종교라는 책에서OO 원종교 대정원장이라는 자료를 발견했다.

사진3. 일본 헌병일지.
사진3. 일본 헌병일지.

원종교는 천도교에서 갈라져서 김중건 선생이 창립한 종교로써 대진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의 뿌리가 되는 종교다. 대진단과 원종교의 연결고리가 생기고 일본인이 서술한 OO 나이 45라는 내용을 보는 순간 신홍균 선생의 나이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한줄기 빛과 같았다. 곧바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탐방은 중국과 다른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자료는 일제의 눈을 피해 기록되고 보관되었지만 당시 일제는 항일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비교적 정확하고 치밀한 기록을 남겨두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쓰여진 자료가 결국 역사를 되찾는데 쓰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주로 방위성과 외무성을 방문했다. 방위성은 헌병대 일지가 보관된 곳이고 외무성은 당시 경무대의 형사기록이 있는 곳이었다. 외무성을 찾아가서 일주일 동안 독립운동 자료를 열람했지만 특별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실망은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일본을 다시 찾았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결과 방위성의 자료가 신홍균 선생과 더 관련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일주일 동안 방위성 자료에 집중했다.

그리고 대진단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OO’이라는 분이 대정원장이라고 밝힌 논문저자인 국민대학교 이계형 교수와 통화했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이계형 교수는 OO은 신흘이다. 신흘이라는 분은 신홍균 선생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신홍균이라는 이름을 놔두고 왜 가명을 썼을까. 이계형 교수는 독립운동가들은 이름을 숨기고 가명을 사용하곤 했다. 체포되었을 때 가족과 친척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며 신흘 선생이 신홍균 선생일 것이라 추정하는 이유는 나이가 비슷하고 원종교의 간부를 역임하고 대진단에서 활동한 사람 중 신 씨는 신흘 선생 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사진4. 일본국립공문서관.
사진4. 일본국립공문서관.

단서가 하나 더 늘었다. 선친의 유서, 동승촌사활, 그리고 신흘이라는 이름이었다. 이를 토대로 헌병일지를 확인했다. 눈에 띈 것은 함경남도 삼수군 강진면 두지리라는 지명이었다. 선친의 유서에는 일제가 1919년 가을 중국 봉천성 장백현에 있는 마을을 습격해 셋째 할아버지인 신동균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죽이고 압록강에 수장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헌병일지에 놀랍게도 19211월 독립운동가들이 삼수군 강진명 두지리에 있는 왜정주재소를 습격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 습격 전날 결성식을 위해 모인 장소가 대진단 사무소였다. 즉 일제의 기록에서도 해당 시기에 대진단 등 독립운동가들이 습격했다는 일본기록을 발견했다. 나는 유서의 내용과 일제의 기록이 일치한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정도로 신홍균 선생을 신흘이라고 확신하긴 어려웠다. 결국 정황증거일 뿐이다. 세 번의 중국 탐방, 두 번의 일본 탐방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독립운동사 발굴을 위한 심기일전을 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신홍균 선생이 신흘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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