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代名醫醫案 (358) - 李杲의 醫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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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名醫醫案 (358) - 李杲의 醫案(6)
  • 승인 2020.03.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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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mjmedi@mjmedi.com


瘟疫案
동양의학대사전에 나오는 이고의 이미지.
동양의학대사전에 나오는 이고의 이미지.

李東垣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脾胃가 勞役의 질환을 받은 데다가 飮食도 다시 절도를 잃어서 병이 날로 깊어졌다. 일을 쉬게 되어 마음이 편안해짐에 지나치게 배불리 먹어 병이 이에 다시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전 壬辰年(1232년)에 수도가 적의 침습에 대비하고 있을 때 三月 下旬에 이르러 敵을 받아들인지 보름 후 포위를 푼 다음에 수도 사람으로 병을 받지 않은 사람이 만명 중에서 한두명밖에 되지 않았다. 병이 들어서 죽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都門 12곳에서 매일 각 門마다 시신이 나가는 숫자가 많은 경우 2천이었고, 적어도 천명 이하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거의 3개월이었으니, 이 백만명의 사람들이 어찌 모두 風寒에 外傷된 것이겠는가? 대저 사람들이 포위된 성 안에 있음에 飮食을 절도를 잃고 勞役에 손상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음이라. 아침에 주리고 저녁에 배불리 먹고, 起居를 불규칙하게 하고, 寒溫을 적합하게 하지 않고, 이와 같이 두세달을 경과하니 胃氣가 휴손된 것이 오래된 것이다. 어떤 아침에 지나치게 배불리 먹으면 사람을 병들게 하고 또 치료에 마땅함을 잃어서 發表하기도 하고 攻下하기도 하여 結胸, 發黃 등으로 바뀌었는데, 또 大陷胸湯, 茵蔯蒿湯 등 湯으로 下하니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대개 처음부터 傷寒이 아님에도 잘못 치료하여 眞傷寒의 證과 비슷하게 변한 것이니 모두 藥의 罪이다. 평생동안 이미 시험해 효과 본 것으로 內外傷辨論 一篇을 지었다. (兪震, 『古今醫案按』)

按語) 李杲(1180-1251): 金나라 시대의 저명한 醫家로서 金元四大家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名醫 張元素를 스승으로 모시고 五臟辨證論治를 전수받았다. 당시에 戰亂 등으로 인하여 飢餓와 疾病이 만연하여 內傷病이 많아 이에 착안하여 內傷學說과 脾胃學說을 제기하여 醫學史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위의 醫案은 醫案專門書籍인 兪震의 『古今醫案按』에 나오는 李杲의 『內外傷辨惑論』을 저술하게 된 계기를 적은 글이다. 勞役, 飮食, 起居, 瘟疫 등을 같이 고려하여 전염병을 바라보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김남일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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