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原者에 대하여(04)구침십이원(영.01)》12원혈(原穴)의 새로운 해석-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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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原者에 대하여(04)구침십이원(영.01)》12원혈(原穴)의 새로운 해석-②
  • 승인 2020.01.3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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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모

김선모

mjmedi@mjmedi.com


2020년 새해가 밝았다. 같은 숫자가 반복된 2020년을 맞이하면서 2000년 세기(世紀)의 전환(轉換)이 있은지 벌써 20년이 지났음에 감회(感懷)가 새로운 사람들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 그 사람들이 떠올린 단어 중에서도 수위(首位)를 다투는 단어가 20세기말의 ‘종말론’이 아닐까 싶다. 20세기 종말(終末)에 대한 강렬한 충격이 숫자 20의 반복을 통해 되살아났기 때문이 아닐까?

1999년 종말론에 대한 뉴스가 넘치던 당시,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저런 예언에 온 재산과 심지어 목숨까지 거는 것일까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내심 나도 불안했던 기억이 있다. Y2K버그와 같은 구체적이고 있을 법한 근거들도 횡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는 있겠다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끝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유들을 찾고 싶을테니까... 하지만 정말 이해가 되지않는 충격은 한참 뒤에 다가왔다. 우리는 별 탈 없이 새로운 세기(世紀)를 맞이하였고 나는 ‘21세기의 체험’ 그 자체의 이유로 사이비 단체가 해산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말 그대로 ‘종말(終末)’이란 마지막 한번의 증명(證明)기회이며 그 민망한 종말을 지나친 ‘현재의 시간’은 교주의 거짓을 증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와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새로운 세기(世紀)을 맞이한 많은 사이비 단체가 더욱 강한 믿음으로 다음 종말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는 충격이었다.  

아마도 사이비 교주가 신도들을 설득한 근거는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하나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믿고 싶은 신도의 마음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처롭고 불쌍해 보여도 논리적인 설득으로 그 믿음을 무너뜨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란 이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가.

일반적인 이성적 판단으로 이러한 신도들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도들의 맹목적인 ‘감정적(感情的) 문제’가 ‘이성적(理性的) 사고’를 차단한 것이라 짐작하고 안쓰럽다 생각한다. 하지만 신도의 어리석은 믿음은 맹목적 감정의 결과만이 아니다. 신도(信徒)의 종말에 대한 믿음과 그 종말예언의 거짓을 명백히 목도(目睹)한 인지(認知)가 맞부딪힐 때, 나의 신념이 부정됨을 두려워하는 이성적(理性的) 방어기제(防禦機制)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지(認知)를 부정하고 나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이성적(理性的) 위로(慰勞)’인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성(人間理性)의 합리성(合理性)에 대해 너무 과도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높은 포도나무의 포도를 따먹지 못한 여우는 포도의 신맛을 직접적인 감각(感覺)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맛볼 수 없는 허전함과 무력함을 견디기 위한 ‘인지수정(認知修整)’은 ‘신맛’이라는 ‘허구(虛構)’를 만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나약한 신도(信徒)의 마음은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의 ‘이성적(理性的) 허구(虛構)’인 것이다.

지난 시간 12원(原)을 해석한 제가들의 해석과 권건혁 박사의 해석을 살펴 보았다. 같은 문장을 두고 제가들은 오장(五臟)으로부터 구각(軀殼)으로의 에너지 이동으로 해석하였고 권건혁 박사는 구각(軀殼)으로부터 오장(五臟)으로의 에너지 이동으로 해석하였다. 덧붙여 영추연구집성 논문저자의 한글해석도 살펴 보았다. 전편에서 밝혔듯이 이 해석들의 차이는 품(稟)의 해석 유무에 있다.

품(稟)자의 자의(字義)를 보면 오해의 여지없이 오장(五臟)이 받아들임 즉 구각(軀殼)으로부터 알맹이로의 에너지 주입 방향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들은 물론 장경악(張景岳) 선생같은 명의도 왜 품(稟)의 주체를 오장(五臟)으로 해석하지 않았을까? 사실 《구침십이원(영.01)》의 앞뒤 문맥만 보아도 그 이유를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① 五臟有六腑, 六腑有十二原, 十二原出於四關, 四關主治五臟, 五臟有疾, 當取之十二原, ② 十二原者, 五臟之所以稟三百六十五節氣味也。③ 五臟有疾也, 應出十二原, 而原各有所出, 明知其原, 睹其應, 而知五臟之害矣。④ 陽中之少陰, 肺也, 其原出於太淵, 太淵二。陽中之太陽, 心也, 其原出於大陵, 大陵二。陰中之少陽, 肝也, 其原出於太衝, 太衝二。陰中之至陰, 脾也, 其原出於太白, 太白二。陰中之太陰, 腎也, 其原出於太溪, 太溪二。膏之原, 出於鳩尾, 鳩尾一。肓之原, 出於脖胦, 脖胦一。凡此十二原者, 主治五臟六腑之有疾者也。

본 조문은 오장(五臟)과 12원(原)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우선 ② “십이원자, 오장지소이품삼백육십오절기미야.(十二原者, 五臟之所以稟三百六十五節氣味也.)” 조문의 앞뒤를 살펴보자. ①의 조문은 “십이원출어사관(十二原出於四關)” 12원(原)은 사관(四關)으로 출(出)한다고 했다. ③의 조문은 “오장유질야, 응출십이원, 이원각유소출, 명지기원, 도기응, 이지오장지해의.(五臟有疾也, 應出十二原, 而原各有所出, 明知其原, 睹其應, 而知五臟之害矣.)” 오장(五臟)에 병이 있으면 응당 12원(原)으로 출(出)한다고 했다.

④의 조문은 각 12원(原)과 연관된 5장(臟)으로부터 출(出)하는 각각의 혈자리를 밝히며 “범차십이원자, 주치오장육부지유질자야.(凡此十二原者, 主治五臟六腑之有疾者也.)” 12원혈(原穴)을 이용하여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전체 조문의 12원혈(原穴)의 속성은 오장(五臟)으로부터 사관(四關)의 12원(原)을 통해 출(出)한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알맹이 오장(五臟)의 질병을 구각(軀殼)의 혈(穴)인 12원혈(原穴)을 통해 ‘진단(診斷)’할 수 있고 ‘치료(治療)’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있는 조문인 것이다.

오장(五臟)으로부터 12원혈(原穴)로의 반응을 살필 수 있다는 말은 오장(五臟)으로부터의 시그널이 출(出)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역대제가들이 ② 조문을 제외한 전체 조문에서 12원혈(原穴)의 방향성을 파악하였을 때 ② 십이원자, 오장지소이품삼백육십오절기미야.(十二原者, 五臟之所以稟三百六十五節氣味也.)는 해석하기 매우 곤란한 문장이었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권건혁 박사는 12원(原)을 오장(五臟)이 365절(節)의 기미(氣味)를 공급받는 곳, 즉, 공급처(供給處)라고 해석하였다. 품(稟)의 자의(字義)를 본다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차십이원자, 내오장지기소주, 삼백육십오절기미지소출야. (此十二原者, 乃五臟之氣所注, 三百六十五節氣味之所出也.)” 이 12원혈(原穴)은 곧 오장지기(五臟之氣)가 주입(注入)되는 곳이며, 365절(節) 기미(氣味)가 나오는(出) 곳이다. 《유경(類經). 장경악(張景岳)》

하지만 장경악 선생을 포함한 대부분의 역대제가들은 품(稟)의 해석을 버리고 전체 조문에 뿌려진 출(出)을 선택하여 12원혈의 방향성을 규정지었다.

“十二原者 五藏之所以稟三百六十五節氣味也”

왜냐면 이 十二個 原穴은 全身의 三百六十五節이 五臟에서 변화된 氣와 營養을 받아 보내져서 모이는 體表部位이기 때문이다.《영추연구집성-영추연구집성간행위원회》

영추연구집성의 논문저자가 해석한 이 어색한 해석은 품(稟)을 해석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장경악(張景岳) 선생처럼 품(稟)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의 경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미안한 추측이지만 논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았을 때 그런 경건한 자세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논문저자는 역대제가들의 의견을 따르려 했으나 해석되지 않은 품(稟)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삼백육십오절(三百六十五節)이 오장(五臟)에서 변화된 기(氣)와 영양을 받았다’는 어디에도 없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이 경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면 구태여 품(稟)을 어색하게 해석하면서까지 끼워 넣었을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역대제가들이 품(稟)을 착간(錯簡)이나 연문(衍文)이라 밝혀 놓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품(稟)을 버렸음에도 품(稟)을 버린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논문저자로서 역대제가들의 정반대의 해석과 그렇다고 명백히 버려지지도 않은 품(稟)의 상식적(常識的) 해석사이에서 느꼈을 곤혹스러움과 조심스러움이 해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난 수천년간 품(稟)은 합리적인 이성(理性)으로 해석될 수 있었음에도 이해(신념)를 벗어나는 품(稟)을 만나는 순간 품(稟)을 버리거나 ‘오장지기(五臟之氣)가 365혈(穴)로 주입(注入)되는’ ‘신포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단 하나의 글자가 전체의 글을 부정하고 있다. 보았으나 보지않은 것으로 눈감아야했던 인지수정(認知修整)은 해석자의 마음을 편하게 했을까?

일부 독자들께서는 아직도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에너지의 방향이 정반대인 단 하나의 글자 품(稟)을 품어야 하는가?

이는 12원(原)에 대한 글을 시작한 첫 기고문에서 밝힌 바 있는 《영추》 1편으로서의 〈구침십이원(영.01)〉의 의의(意義)를 파악한다면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지난 2019년 12월 13일자 민족의학신문 기고문 十二原者에 대하여(01)에서 《황제내경》은 12원(原)을 통한 진인(眞人)으로의 초월(超越)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음을 공부하였다.

진인(眞人)으로의 초월(超越)을 위한 진식(眞息)의 의의(意義)와 인간(人間) 생명(生命)의 에너지 공급(供給)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었다면 품(稟)이 가진 중요성과 의의(意義)를 결코 간과(看過)할 수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명백한 근거에도 교주(敎主)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신도(信徒) 자신의 명백한 인지(認知)를 수정(修整)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는 나약한 인간의 한 단면이다.

명백히 인지(認知)할 수도 있었던 품(稟)을 수천년간 외면하여 신포도의 허구를 만들어 왔다. 이해가 안가는 바도 아니다. 이해하고 싶으나 이해하지 못한 반복적 실패는 ‘이성적 위로’에 익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허전함과 무력감에 극에 달한 갈증은 눈앞의 오아시스도 헛것이라 포기할만큼 잔인하다.

12원(原), 이제는 그 달콤하고도 탐스러운 포도를 양손에 쥐고 입안 한가득 채워 탐닉하자. 극에 달한 갈증으로 쪼그라붙은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 달큰함에 흠뻑 젖어들 것이니...

 

김선모 / 반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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