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3)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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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3) - 윤창열
  • 승인 2004.08.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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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峴首山 王叔和墓 □

우리는 襄陽에서의 마지막 관람코스인 王叔和의 무덤을 찾아갔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여 미리 王叔和의 묘를 답사를 했지만 좀처럼 찾지를 못하다가 수소문 끝에 간신히 장소를 찾아내었다는 것이다.
위치는 勝利街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唐杜工部之墓라는 비석을 지나면 晉太醫令王叔和之墓라는 조그만 비석이 하나 보일 뿐 무덤 자체는 보이지도 않는다.
杜甫(杜工部)의 무덤이야 말할 것도 없이 의관총 이지만 왕숙화의 묘는 무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초라하다.

비석에는 1983년 初冬에 양번시 문물관리소에서 세웠다는 기록이 附記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무덤은 큰길가(襄荊路)에 있었는데 두보의 의관총과 함께 신작로를 낼 때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바로 옆에는 골재공장이 있어 작업하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襄荊路의 길을 낼 때 무덤까지 이곳으로 옮겼다 하나 지금 무덤은 아예 자취도 없고 비석도 반은 자갈더미 속에 묻혀있었다. 너무도 쓸쓸하고 초라한 모습에 우리들도 마음이 착잡하였다.

王叔和(서기 201~280)의 이름은 熙이고 山陽 高平(지금의 山東省 魚臺縣 東北)사람이다. 일찌기 晋 太醫令을 지냈으며 張仲景의 傷寒雜病論중에서 傷寒論 부분을 재편집하여 후세에 전했으며 脈經을 저술하였다.
그는 만년에 피난을 와서 이곳 양양에 寓居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자료를 보면 峴首山의 북쪽에 왕숙화 우물, 紀念石牌坊 등이 있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허전한 마음을 안고 자리를 뜨는데 비석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협죽도 나무에서 꽃을 활짝 피우고 있어서 그나마 실망했던 우리의 마음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하고 북경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여행이란 피곤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경험과 지식의 축적은 피로를 이겨내고도 남을 활력소를 제공한다.

卞和가 和氏璧을 발견했던 남장현의 玉印岩, 楚나라의 초기 도읍지였던 宜城市의 楚皇城, 襄陽 鹿門寺, 劉秀의 고향 白水寺등을 보지 못하여 아쉬움도 있었지만 後日을 기약하고 4인 1室의 침대칸 軟臥에 몸을 실었다.

□ 北京의 역사 □

우리 일행은 모여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기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앉아서 술도 한 잔 하면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술이 몇 잔 오가면서 하나 둘씩 자리를 떴고 필자도 옛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는 1993년 심양에 있는 요령중의학원에서 방문교수로 1년을 머무르고 있을 때 중국의 여러 곳을 여행했는데 낮에는 관광을 하고 밤에는 기차로 이동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이러한 여행은 시간을 절약하면서 많은 곳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대단히 힘이 들고, 건강해야 할 수 있는 苦行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창가로 나가보니 기차는 하북성의 內丘縣, 高邑縣을 지나 石家莊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內丘縣은 가장 큰 편작의 사당이 있는 곳이고 高邑縣은 후한 광무제 劉秀가 A.D. 25년 千秋亭을 쌓고 帝位에 오른 곳으로 언젠가는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곳이다.

나는 왼쪽에 있는 태항산(太行山)을 바라보면서 중국의 역사 등을 생각하는 동안 기차는 석가장 역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탄 기차는 고장이 나서 석가장에서 1시간 이상 지체하다가 예정시간을 훨씬 지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북경의 기차역은 북경역 말고도 동역, 서역, 남역, 북역이 있는데 아마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역인 듯 하다.

북경에서 나온 가이드를 만나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을 했다. 버스 속에서 그도 역시 중국과 북경에 대한 소개를 해 주었다.
북경은 華北平原의 북쪽에 위치해있는데 물속에는 석회질이 많아서 이를 침전시킨 후에 마시든지 끓여서 마셔야지 그냥 먹으면 담낭염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1년의 강수량이 600mm 밖에 안돼 대단히 건조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기회로 대만이 독립을 도모할 것이라는 이야기, 중국과 대만의 전쟁이 나면 대만에서 삼협댐을 폭파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 중국에서 작년(2002년)에 최고로 많이 소비된 맥주가 燕京맥주이고 다음이 靑島맥주, 3위가 심양의 雪花맥주라는 이야기, 북경에서는 곳곳에서 붉은 색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이 숭배하는 색으로 부귀와 존엄을 상징한다는 이야기 등등이었다.

北京은 중국의 六大古都 중의 하나이며 70~50만 년 전에 北京猿人이 살았던 人類의 發祥地 중의 하나이다.
B.C. 586년 春秋時代때 燕나라가 이곳에 都邑을 정하고 “계(계)”라고 했는데 이곳에 “엉겅퀴”가 많아서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燕京이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유래하였다.
요나라 시대에는 陪都로써 南京이라 했고 金나라 때에는 1153년 正式으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中都라 했으며 元나라 때에는 大都라 했다.

1368년 朱元璋은 南京에 도읍을 정하고 大都를 北平이라 했는데 주원장의 네째 아들 燕王 주체(朱체)는 建文帝를 몰아내고 皇位를 탈취한 뒤에 北平에 皇都의 건설을 시작하여 1421년 천도를 하면서 北京으로 이름 했는데 이것이 北京이라는 명칭의 시작이다.
이후 명·청 양대에 이르기까지 800여년 간 首都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현재 16개의 區와 2개의 縣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1400만명 정도라고 한다. <계속>

필 자 약 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대한한의학원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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