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2)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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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2) - 윤창열
  • 승인 2004.07.3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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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顧草廬의 현장 隆中 □

⑤ 六角井과 三顧堂, 諸葛草廬

六角井은 三顧堂과 草廬亭 사이의 우측에 있는데 제갈량이 隆中에서 생활할 때 사용하던 우물이다. 6개의 돌기둥과 6개의 石壁으로 이루어진 六角井은 최초로 習鑿齒(字 彦威, 東晉史學家, 著 漢晉春秋)가 쓴 《襄陽記》에 나오는데 “襄陽有孔明故宅하고 有井한데 深五丈 廣五尺이니 曰葛井이라”하였다.

이 六角井은 제갈량 당시의 유일한 자취로 융중의 제갈량 故居가 여러번 파괴를 당한 뒤에도 諸葛草廬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다. 돌을 가지고 지금처럼 난간을 쌓은 것이 어느 때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갈량이 10년간 머무르던 당시의 유일한 흔적이라 하니 느낌이 새롭다.

六角井의 오른쪽에는 襄王陵이 있다. 襄王陵은 朱見淑의 무덤인데 그는 1489년 제갈량의 草廬가 明堂자리라 하여 草廬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뒤 張獻忠, 李自成에 의해 이 무덤은 파헤쳐지게 된다.

六角井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三顧堂이 있다. 三顧堂은 유비가 三顧茅廬하고 제갈량이 隆中對를 한 紀念堂인데 안에는 공명이 유비에게 隆中對를 말하고 있는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三顧堂 入口에는 “兩表는 酬三顧요 一對는 足千秋라”는 대련이 붙어 있다.

또 이곳에는 董必武가 쓴 “諸葛大名垂宙宙 隆中勝跡永淸幽”라는 유명한 대련도 있다. 三顧堂 문 앞에는 3그루의 하늘을 찌를 듯한 古柏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유관장 3인이 三顧茅廬 했을 때 말고삐를 맸던 나무라고 한다. 원래의 나무는 이미 말라 죽었으며 지금의 나무는 康熙 59년(1720년) 원래의 위치에 새로 심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다 위로 올라가면 諸葛草廬가 나온다. 이것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草堂, 客房, 침실, 주방 등이 갖추어져 있는데 TV연속극 “諸葛亮”을 여기서 촬영했다고 한다. 제갈량 당시의 참 모습을 느끼기에는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흥취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古柏亭, 臥龍深處가 나오고 맞은편 산인 樂山(제갈량이 늘 이 산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놀았기 때문에 낙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다)에는 제갈량이 거문고를 타던 琴臺, 장인 황승언과 바둑을 두던 棋盤石, 제갈량이 천문을 보던 觀星臺, 抱膝石, 梁父巖등의 景點이 있지만 우리는 관람을 여기서 마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매년 4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明代에 이미 草廬亭, 躬耕田, 三顧堂, 小虹橋, 六角井, 武侯祠, 半月溪, 老龍洞, 梁父巖, 抱膝石을 隆中十景이라 하였다 한다.

⑥ 諸葛亮의 躬耕地는 南陽의 臥龍崗이 아니고 襄陽의 隆中이다.

제갈량이 17살부터 유비를 만난 27살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은 南陽의 臥龍崗인가 아니면 襄陽의 隆中인가. 이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을 벌여왔고 최근에도 1987년부터 1990까지 여러차례 학술대회가 열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문제는 襄陽의 隆中으로 결론이 났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역대의 서적과 문헌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의 躬耕地는 襄陽의 隆中임이 始終一致하고 있다.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권35에 裴松之가 注를 달기를 “蜀記曰 晉永興中에 鎭南將軍劉弘이 至隆中하야 觀亮故宅하고 立碣表閭하고 命太傅연건爲李興하야 爲文하다.” 永興(서기 304~306년)은 제갈량 사후 약 70년 되는 때로 시간적 거리가 멀지 않은데 분명히 隆中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A.D 360년 전후의 史家 습착치(習鑿齒)의 기록, 437년 盛弘之의 《荊州記》의 기록, 6세기 초기의 鮑至의 기록, 水經注의 기록 등이 모두 시종일관 隆中이 제갈량의 故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漢晉春秋에 “亮家于南陽之鄧縣하니 在襄陽城西二十里하니 號曰隆中”이라 하였다. 先秦兩漢에서 宋,齊때까지의 鄧縣은 지금의 襄樊市 북쪽 교외의 鄧城遺址處이며 옛날의 鄧縣 행정구역은 漢水 남쪽에 까지 걸쳐 있었는데 隆中도 그 구역내에 속해 있었다. 南陽之鄧縣을 지금의 남양 남쪽에 있는 鄧州市로 오해하면 안 되는데 옛날 鄧縣의 중심지는 지금도 완전히 보존되고 있는 襄樊市 樊城區에 있는 鄧城遺址이다. 유명한 역사지리학자 譚其양도 “역사상의 행정구역은 완전히 自然山水만으로 나눌 수 없다. 南陽郡과 南郡의 경계는 기본상 漢水로 경계를 삼지만 서로 出入이 있다. 隆中은 沔水(면수, 즉漢水) 以南이지만 당시에 南陽郡에서 관할하였다.”라고 하였다.

셋째, 東漢末年 남양의 宛縣 일대는 전쟁이 빈번하여 中原의 선비들이 모두 荊州(襄陽)에 피난하였고 유비가 “三顧茅廬”시에 宛縣은 조조의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는 결코 조조의 관할구역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또 諸葛玄이 劉表를 찾아가 의탁했기 때문에 공명의 거처가 유표가 다스린 형주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다. 襄陽은 漢獻帝 初平元年(서기 190년) 劉表가 荊州牧이 되면서 州의 首府를 湖南 漢壽에서 襄陽으로 옮기면서 큰 전쟁이 없는 안정된 장소였다.

넷째, 제갈량이 양양에서 많은 名士등과 교류를 했는데 그들의 친척이 모두 襄陽에 있었고 제갈량의 친구 중에는 南陽의 宛縣에 살았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제갈량이 스승으로 예우했던 龐德公도 襄陽사람이고 그의 작은누나는 방덕공의 아들 龐山民에게 시집갔고 장인 황승언도 이곳 사람이다.

다섯째, 제갈량의 躬耕地 문제는 古今中外史學界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이 隆中이라고 결정이 났으며 中國 政府에서도 分明히 襄陽 隆中은 “諸葛亮故居”이고 南陽 臥龍崗은 “武侯祠”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 劉備가 的盧를 타고 뛰어 넘었던 檀溪 □

제갈량이 살았던 隆中의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유비가 蔡瑁 등에게 쫓겨 的盧를 타고 뛰어넘었던 시내인 檀溪를 찾았다. 馬躍檀溪處는 양양성의 서쪽 眞武山 기슭에 위치해 있었는데 비스듬한 바위에 말발굽모양의 흔적 비슷한 것이 있어 이곳이 유비의 말이 박차고 솟구친 흔적이라 하나 사실을 믿을 수는 없는 듯하다.

당시 伊籍의 귀뜸으로 유비가 單騎로 도망을 쳐서 건넜다는 檀溪는 삼국지를 보면 넓이가 數丈(1丈은 약 3m)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수 미터에 불과하고 물도 거의 없었다. 이 襄陽에는 三國志와 관련된 유적이 여러군데 널려있다. 조사에 의하면 양번과 관련된 이야기가 총 120回中 31回에 걸쳐서 나온다고 한다.

유비는 이곳 檀溪를 지나서 水鏡莊을 찾아가게 되고 이곳에 은거하고 있던 司馬徽는 “伏龍鳳雛二人에 得一人이면 可安天下라”하여 孔明을 추천하고 이후 유비는 隆中을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水鏡莊은 南장縣에 있는데 山水의 경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이 馬躍檀溪處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고 西南쪽을 바라보면 眞武山이 보이고 宮觀도 보이는데 眞武山은 武當山이 시작하는 起點으로 이것이 武當山의 首峰이 되며 이곳의 宮觀 眞武觀은 武當山의 第一宮觀이라고 한다.

나는 이전에 武當山을 가 본적이 있는데 무당산은 眞武大帝를 主神으로 받들고 있는 山이라 眞武山으로 한 것 같다. 예로부터 武當山에 참배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이곳에 와서 焚香하고 예를 올렸다고 한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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