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1)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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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1) - 윤창열
  • 승인 2004.07.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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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顧草廬의 현장 隆中 □

③ 武侯祠

무후사는 대략 서기 361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이곳은 제갈량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입구는 세로로 “漢諸葛丞相武侯祠”라 쓰여져 있고 아래에는 3명의 신선의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天흔(치켜들 흔)”“地揭(들 게)”란 글이 쓰여져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기둥들이 땅에 까지 닿지 않게 해 놓았는데 孔明의 천문조화를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면 제갈량의 銅像이 서 있다. 위에는 “臥龍遺址”라고 董必武가 쓴 글이 있다.
이 동상은 2002년에 새로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만력년간에 만든 초상화가 있었다고 한다. 키는 1.8m 정도 인데 실제 제갈량의 키라고 하며 입은 옷은 삼국지 드라마에서 입은 옷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中堂에는 “三顧遺跡”이라고 題하였고, 곽말약이 쓴 “志見出師表 好爲梁父吟”이라는 글이 있고 기둥에는 “二表深心透武略 三分鼎足見文韜(감출 도)”라고 王學仲이 쓴 글이 있다.
中堂을 지나면 圓柏과 側柏이 있고 左右에 양번에서 태어난 文臣 6명과 武臣 6명의 상을 조상해 놓았다고 설명을 한다.

문관으로는 費褘 向郞(字 巨達), 習楨(字 文祥), 馬良(187~222, 字 秀常), 蔣琬, 龐統(179~214, 字 士元)이 있었고 武臣으로는 諸葛均, 馬謖(190~228, 字 幼常), 習珍, 向寵(?~240), 廖化(?~264, 字 元儉), 鄧芝 등이 있었는데 모두 양양 사람들도 아니고 文臣, 武臣의 구별도 불분명하였다. 아마 제갈량과 가장 가까웠던 이곳과 이곳 주위의 사람인 듯 하였다.

당시에 전국이 혼란하였지만, 이곳 양양만은 안정되어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學問을 연마하여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다.
이를지나 마지막에 있는 正殿에는 “天下奇才”라 題한 현판이 있는데 2003년에 死한 양번의 서예가 王樹人의 글이라고 한다.

中央에는 공명이 흰 부채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있고 오른쪽에는 아들 諸葛瞻, 왼쪽에는 손자 諸葛尙의 모습이 조상되어 있다.
공명의 左右에는 두 동자가 侍立해 있는데 한사람은 칼을 들고 한사람은 상자를 들고 있다.
이를 지나 왼쪽 칸으로 나오면 제갈량의 夫人 黃月英의 상이 있고 모택동과 강청의 딸 李訥이 쓴 “智慧賢淑“이라는 글이 있다.

좌우에는 ①承彦擇壻(황승언이 사위를 선택하다) ②羽扇定情(黃月英이 白羽扇부채를 만들어 주며 결혼을 약속하다) ③牛車迎親(공명이 아내를 소에 태워 데려오다) ④同耕共讀(함께 농사 지으며 함께 글을 읽다) ⑤木人磨面(황씨부인이 木人을 만들어 곡식을 갈아 분말을 만들다) ⑥敎子成才(자식을 가르쳐 인재를 만들다) 등의 내용을 묘사해 놓았는데 공명의 부인 黃月英의 재주의 덕을 칭찬하는 내용들이다.

이곳을 지나가면 三義殿이 나오는데 유관장 3인이 도원결의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인물들을 아주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고 입구의 左右에 청룡언월도와 장팔사모를 배치하고 있었다.

④ 공명의 一生

이를 지나가면 공명의 일생을 人物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데 모두 30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명의 일생과 그의 공업을 요약해 놓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1) 避亂荊州(14살에 숙부를 따라 형주에 옮)
(2) 襄陽就讀(양양성의 남쪽에 있는 學堂에 입학하여 책을 읽음)
(3) 躬耕농畝(17살 때 隆中에 移居하여 몸소 농사지으며 苦學을 함)
(4) 拜師求學(여러차례 龐德公의 집에 가서 공부함)
(5) 交游切磋(崔州平, 徐元直, 石廣元, 孟公威 등과 교류하며 절차탁마함)
(6) 羽扇定情(沔南, 즉 漢水남쪽의 名士인 황승언이 딸의 결혼을 허락함. 黃月英이 공명의 재주를 앙모하여 부채를 만들어 주며 결혼을 약속함)
(7) 觀測星象(樂山의 정상에서 觀星臺를 만들어 놓고 천문과 기상을 연구함)
(8) 抱膝吟嘯(농사를 짓다가 휴식을 취할 때 무릎을 안고 梁父吟을 읊고 휘파람을 붐)
(9) 一顧草廬(207년 가을 유관장 3인이 초려를 처음 찾아감)
(10) 二顧草廬(이해 겨울 다시 초려를 방문하여 공명의 장인 황승언만 만나고 감)
(11) 三顧草廬(초려에서 유비가 공명을 만남)
(12) 隆中對策(공명이 유비에게 당시의 형세를 분석하고 三分天下之計와 전국통일의 전략을 설명함. 이것이 유명한 隆中對이다.)
(13) 去梯求計(유기가 계모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명을 청해 樓에 오른 후 사다리를 제거하고 계책을 구함)
(14) 火燒博望(208년 여름 조조의 장수 하후돈이 신야를 공격할 때 처음으로 계책을 써서 博望을 불태워 조조의 군사를 대패시킴)
(15) 舌戰群儒(손권과의 동맹을 위해 강동에 가서 張昭 등의 主降派를 설득함)
(16) 草般借箭(주유가 3일 이내로 10만개의 화살을 만들어 오라고 하자 공명이 3일째 되는 날 새벽안개가 끼었을 때 快船 20척에 草人을 묶어 놓고 북쪽에 활을 쏘자 조조의 군사가 활을 쏘자 이를 거두어 돌아옴)
(17) 借東風(조조를 물리치는데 오직 火攻을 써야 하는데 만사가 다 갖추어졌으나 단지 東風이 부족하자 제갈량이 七星壇에 올라 동풍이 불기를 기도함)
(18) 赤壁大戰(208년 11월 孫劉연합군이 조조군과 적벽에서 전쟁을 할 때 불로 戰船을 불태움. 적은 군사력으로 강한 대군을 제압하여 조조군을 대패시킴)
(19) 孔明弔喪(주유가 연속 제갈량의 계책이 적중하자 울화병이 나서 巴口에서 사망하자 제갈량이 친히 조운을 데리고 가서 弔喪함)
(20) 智取漢中(219년 한중을 取하여 유비가 자립하여 漢中王이 되게 함. 孔明을 軍師에 봉하고 五虎大將軍을 봉함)
(21) 丞相理政(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고 제갈량을 승상에 封함. 공명은 농업에 힘쓰게 하고 水利사업을 하여 촉한 사회를 발전시킴)
(22) 劉備託孤(223년 백제성에서 유비가 죽으면서 어린 유선을 부탁함)
(23) 出使東吳(제갈량이 鄧芝를 동오에 파견하여 동맹을 회복함)
(24) 七擒孟獲(225년 군사를 거느리고 南征함. 心戰의 법을 써서 七縱七擒함. 이후 남방에서는 반란이 발생하지 않음)
(25) 出師表(227년 후주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3軍을 거느리고 北伐中原함)
(26) 收姜維(1차 북벌때 天水軍 參軍 姜維를 발견하고 將帥의 재질로 여기고 투항을 받음)
(27) 空城計(처음 祁山에 出兵했으나 마속이 가정을 잃어 사마의가 직접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西城으로 옴. 이 때 단지 2500명의 군사만 있어 空城計를 써서 사마의의 군사가 물러가게 함)
(28) 木牛流馬(233년 제갈량이 六出祁山 했을 때 木牛流馬를 만들어 斜谷, 劍閣의 사이에서 粮草를 운반)
(29) 혁退司馬懿(혁퇴사마의: 234년 8월 23일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病死함. 姜維 등이 생전의 유지에 따라 공명의 木雕像으로 사마의의 군사를 물리침)
(30) 名垂千古{유선은 제갈량을 定軍山에 안장케 하고 제갈량에게 忠武라는 시호를 내림. 이후 一代名相諸葛亮의 “鞠躬盡췌(국궁진췌)而后已”의 정신은 역대 백성들의 애도와 추앙을 받음}.

千古名相諸葛亮 彩塑微縮景觀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화려한 彩色과 더불어 아기자기 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묘사하고 있는 중국사람들의 문화 예술적인 독특함도 맛보았다.
나는 이 모든 내용을 기록하느라 일행에서 뒤떨어져서 혼자만 남게 되어 계단을 뛰어서 내려와 뒤쫓아가니 우리 일행은 六角井에서 쉬고 있었다. <계속>

필 자 약 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대한한의학원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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