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0)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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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0) - 윤창열
  • 승인 2004.07.1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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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顧草廬의 현장 隆中 □

① 隆中을 찾아가다

우리는 양양성의 북문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약 30리 정도 떨어진 古隆中을 향해 출발하였다. 성이 끝나는 양양성의 西北쪽 모퉁이가 夫人城인데 차 속에서 스치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차는 檀溪路를 지나 谷城으로 가는 길을 타고 가다가 남쪽으로 진입하면 된다. 멀리 隆中山이 보이고 騰龍閣이 보인다. 隆中이란 명칭은 평지에 산이 우뚝 솟아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 하며 등용각은 이곳에 臥龍이 거처 했으므로 昇天하라는 뜻으로 근래에 지은 것이라 한다.

나관중의 三國志演義에는 이 융중산을 묘사하기를 “山不高而秀雅하고 水不深而澄淸하며 地不廣而平坦하고 林不大而茂盛하며 猿鶴相親하고 松篁(대숲 황)交翠”라고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관중이 정말 이곳을 방문하고 이렇게 묘사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삼국지연의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平話(講史話本)등을 기초로 완성한 것이므로 와보지 않았어도 옛 글을 따라 묘사가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가는 도중에 隆中廣場이 있고 큰 패방이 서 있는데 1992년에 완공을 하였고 2000년에 강택민이 이곳에 와서 회의를 주재했다고 한다.

諸葛亮의 고향은 山東省 琅邪郡(낭야군) 陽都(지금의 산동성 沂南)이다. 서기 181년에 출생한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모두 잃고 8세부터 叔父인 諸葛玄의 집에서 자랐다. 194년 그의 나이 14살 때 제갈현은 제갈량의 4남매를 데리고 豫章(지금의 江西省 南昌)太守로 부임을 하였다. 그러나 漢의 조정에서는 朱皓(주호)를 파견하여 옴으로 관직을 잃은 제갈현은 제갈량등을 데리고 형주로 가서 옛 친구인 劉表에게 의탁하였다. 이렇게 해서 제갈량은 양양성에서 3~4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서기 197년 제갈량 17살 때 숙부 제갈현은 세상을 떠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제갈량은 곧 양양성을 떠나 성의 서쪽 30리 되는 隆中에 은거를 하게 되는데 유비를 만나는 27세까지 그는 이곳 隆中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② 古隆中 牌坊에서 草廬碑까지

隆中大門을 들어서면 우뚝 서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古隆中牌坊이다. 패방의 正面 中央에는 “古隆中”이라는 글씨가 힘있게 쓰여져 있으며 양쪽의 기둥에는 “三顧頻煩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이라는 두보의 詩句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유비가 자신을 낮추어 賢士를 예우한 정신과 제갈량이 先主와 後主를 위해 헌신한 충성심을 압축하여 표현한 내용이다.

또 제갈량의 古訓인 “淡泊明志, 寧靜致遠”은 양쪽의 小門에 가로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三代下一人”이라는 글과 양쪽의 기둥에 “伯中之間見伊呂 指揮若定失蕭曹(공명의 재주는 이윤이나 강태공과 백중지세를 이루며 마음속에 이미 모든 생각을 갖추어 사물을 지휘하니 소하와 조참이 失色을 한다)가 새겨져 있는데 三代下一人은 蘇軾의 제갈량에 대한 평가라 하는데 하은주 三代이후로는 제갈량에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곳을 지나면 荷花池가 나오는데 연꽃으로 채워져 있고 가운데에는 風荷伴月亭이 있어 사람들이 휴식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이곳을 지나면 정자안에 躬耕농畝(궁경농무)라 쓴 비석이 있는데 躬耕田 앞에다가 2002년 劉華淸이 쓴 글이다. 가이드는 이 부근에 있는 襄樊學院도 당시 공명이 농사짓던 곳에 세웠는데 많은 人才가 나오기를 염원하여 세운것이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오른쪽을 향해서 조금 가니 小虹橋라는 石橋가 나온다. 이 다리는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데 유비가 두 번째로 草廬를 찾아갔을 때 공명의 장인 황승언이 읊은 詩에 “騎驢(나귀 려)過小橋라가 獨歎梅花瘦로다(나귀를 타고 작은 다리를 지나다가 홀로 매화꽃이 진 것을 탄식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다시 오른쪽을 향해 올라가면 抱膝亭이 나온다. 이곳은 공명이 농사를 짓다가 힘들면 무릎을 안고서 梁父吟을 읊조리던 곳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면 비희가 큰 비석을 지고 있고 草廬라는 비문이 쓰여진 草廬碑가 나오는데 가이드는 이곳이 공명의 초려가 본래 있었던 자리라는 설명을 해주었다. 비희는 용의 아들 9명중에서 제일 막내아들로 모든 용의 아들들이 龍門을 뛰어 넘어야만 완전한 용이 되는데 막내는 父母와 형들의 사랑을 받고 도를 닦는 것을 게을리 하여 용문을 뛰어넘지 못했다 한다. 그래서 비희는 용의 머리에 거북의 등, 매의 발톱을 하고 있는데 힘이 세어서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등위에 비석을 세우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는 제갈공명이 촉한을 세우고 중임을 맡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래도 비희는 용의 아들이므로 얼굴을 만지면 평생 근심이 없고 등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어 관광객들이 하두 만져서 얼굴이 반질반질 하였다. 비석 뒤에는 龍臥處라는 글이 쓰여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武侯祠가 나온다. 왼쪽에는 중국의 역사지리학자 譚其양이 쓴 비석이 서 있는데 제갈량이 농사짓던 곳은 이 곳 隆中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비석이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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