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6) - 윤창열
상태바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6) - 윤창열
  • 승인 2004.06.11 14: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 하남성 南陽 □

(1) 제갈공명 사당 武侯祠 (전호에 이어)

③ 草廬, 寧遠樓, 關張殿

武侯祠를 지나 뒤로 가면 草廬가 나오는데 공명이 몸소 농사지으면서 살던 집이라고 한다. 초려는 八角으로 되어있고 안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漢諸葛孔明舊廬”라고 쓰여 있었다. 이 초려는 南陽시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TV 등에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초려의 오른쪽에는 古柏亭이 있는데 이곳에는 본래 공명이 친히 심은 측백나무가 있었는데 명나라 말기에 훼손이 되자 이 정자를 지어서 기념한 것이라 한다. 지금도 측백나무가 있는데 넘어진 것을 기둥으로 받치고 있었다.

왼쪽에는 野雲菴이 있다. 이곳은 공명이 친구들을 만나 노래를 부르던 곳이라 한다. 초려와 小虹橋를 지나니 왼쪽에는 제갈량이 天文을 관찰하던 半月臺가 있고 오른쪽에는 제갈량이 농기구를 보관하던 躬耕亭이 있다.

淸 康熙 51년(1712년) 南陽의 知府 羅景大는 武侯祠를 크게 증수하고 “臥龍崗十景”을 명명했는데 여기에는 草廬, 古柏亭, 梁父岩, 抱膝石, 半月臺, 老龍洞, 野雲菴, 諸葛井, 躬耕田, 小虹橋등이 포함된다.

또 寧遠樓라는 건물이 있는데 공명이 아들 諸葛瞻에게 주는 글에 “非澹泊이면 無以明志오 非寧靜이면 無以致遠이라(검소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먼 곳에 이를 수 없다)”는 글에서 따온 글이다.

삼국지에도 유비가 두 번째로 공명을 찾아갔을 때 門에 “淡泊以明志하고 寧靜以致遠”이라는 대련이 쓰여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도 20대 때부터 이글을 항상 머리 속에 기억하고 다녔는데 無慾과 安靜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字가 思遠인데 아마 이의 영향을 받아서 지은 듯 하다.

寧遠樓에는 萬古雲소(만고운소)란 현판이 걸려있고 “能攻心則反側自消하니 從古知兵非好戰이요 不審勢卽寬嚴皆誤니 后來治蜀要深思라”는 대련이 걸려 있다. 이 대련은 4곳의 武侯祠에 모두 걸려 있다고 하는데 모택동이 성도의 武侯祠에 들러 이 글을 보고 감동했다는 말을 듣고는 南陽사람들이 성도에 가서 탁본을 하여 걸어 놓은 것이라 한다.

윗 글의 내용은 전쟁을 할 때는 적을 이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마음을 감동시켜 그를 心服하게 하면 배반하는 사람(反側)이 저절로 없어지니 예로부터 병법을 아는 사람은 결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고 형세를 살피지 않으면 정책이 너그럽거나 혹은 엄하건 모두 잘못이니 뒤에 蜀땅에 와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攻心의 전략은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할 때 마속의 건의를 받아들여 孟獲을 七縱七擒하여 다시는 배반하지 않게 했다는 方法이다.

寧遠樓의 안은 3칸으로 되어있고 밀랍인형으로 꾸며 놓았는데 첫 번째는 서서가 공명을 추천하는 장면이고 둘째는 유관장 3인이 공명을 찾아오는 것이고 셋째는 제갈량 부부와 제갈균 부부 등이 꾸며져 있다.

躬耕亭을 지나 옆문으로 나오니 三顧堂이 있는데 수리 중에 있었다. 안에는 孔明이 유비에게 三分天下의 계획을 설명하는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밑으로 내려오면 關張殿이 나오는데 유비가 공명과 대화하는 중에 관우와 장비가 기다리던 것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관장전 앞에는 유관장 3인이 말을 메어둔 것을 기념하는 비석도 있었다.

④ 漢代文化苑

武侯祠의 관람을 끝내고 옆에 있는 한대 문화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화원의 입구에는 청나라 때 만든 龍門照壁이 있었는데 잉어가 龍門을 뛰어 넘으면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자식들이 과거에 합격하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문화원으로 가는 중간에는 漢碑亭이 있었고 왼쪽에는 張衡이 만든 地動儀가, 오른쪽에는 장중경의 약탕관을 전시하고 있었다.

“東漢南陽歷史展覽”이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후한의 건국자인 劉秀와 28將 등에 대한 설명과 소를 타고 있는 劉秀의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또 당시 남양을 훌륭하게 다스렸던 召信臣과 杜詩에 관련된 내용도 전시하고 있었다. 後漢書에 보면 남양에서 善政을 베풀었던 인물로 “前有召父하고 後有杜母라”는 말이 있는데 後漢때 召信臣이 이 곳에서 善政을 베풀고 떠난 후 杜詩가 와서 다시 善政을 베풀자 남양의 백성들이 두 太守의 善政을 칭송한 것으로 여기서 召父杜母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곳은 南陽의 역사와 人物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간을 두고 볼만한 가치가 있었으나 시간이 바쁜 우리는 대충 훑어보고는 무후사의 관광을 모두 매듭지었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