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5)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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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5) - 윤창열
  • 승인 2004.06.0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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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남성 南陽 □

어제저녁 손님이 거의 없는 호텔에서 모처럼의 피로와 회포를 풀었던 우리 팀은 8월 9일 아침 흩뿌리는 빗길을 뚫고서 南陽땅으로 향했다.
원래 이곳 襄樊의 호텔은 삼국지 유적을 탐방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주요고객인데 SARS 때문에 일본인 관광객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양번에서 남양으로 가는 길은 등주를 거쳐가는 길과 新野를 거쳐가는 두 길이 있는데 우리는 新野를 거쳐 북상하였다. 가이드는 삼국지 제40회에 나오는 諸葛亮火燒新野(제갈량이 불로 신야를 불태우다) 등의 이야기를 들러 주면서 南陽에 대한 소개를 해 주었다.

南陽은 河南省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하남성의 역사가 유구한 도시이다. 省都인 鄭州 다음의 큰 도시로써 인구는 110만 명 정도라고 한다. 南陽의 역사는 유구하여 史記 齊太公世家에 “姜太公의 先祖인 四岳은 禹를 도와 治水에 功이 있었으므로 虞夏 시기에 呂侯에 봉해졌고 혹은 申에 봉해졌다”라 하였는데 申, 呂는 모두 南陽 부근으로 옛날에는 南陽을 申呂之國 이라고 불렀다.

西周시기 南陽은 남방의 重地였고 宣王(周의 11대 王)은 그의 외삼촌인 申伯을 여기에 봉하였으므로 또 申伯國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春秋시기에 초나라는 북방으로 세력을 확대할 때 초 문왕(B.C 690~677)은 申을 멸망시키고 宛邑(완읍)을 설치하였는데 宛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西漢 시기에는 冶鐵業과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商遍天下 富冠海內”라는 칭송과 함께 전국 6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東漢 시대에는 光武帝 劉秀가 南陽에서 帝業을 일으켜 “南都”, “帝鄕”이라고 불렀다.

특히 南陽 사람들은 南陽에 四聖이 있다고 말하는데 科聖 張衡, 智聖 諸葛亮, 醫聖 張仲景 그리고 商聖 范려(범려)이다. 범려는 일찌기 越王 句踐을 도와 吳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의 치욕을 씻는데 1등 공을 세웠으나 그 뒤 월나라를 떠나 齊나라로 가서 큰 부자가 되었던 인물이다.

(1) 제갈공명 사당 武侯祠

우리가 南陽에서 제일 먼저 관광한 곳은 臥龍崗에 있는 武侯祠이다. 길가에 “張仲景國醫大學”이라고 간판을 단 건물이 스쳐지나간다.
이 대학은 1985년에 成立되어 전국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南陽시는 諸葛孔明의 武侯祠가 없었다면 지금도 큰 발전이 없었을 정도로 전국에서 諸葛孔明의 사당인 武侯祠를 보러오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도시의 발전을 가속화 한다고 한다.

武侯祠가 위치한 臥龍區(南陽시에는 宛城區와 臥龍區의 두 區가 있다)에는 諸葛亮의 氣를 받기 위해서 특히 학교를 많이 지었다 한다.
諸葛孔明의 사당을 武侯祠라고 하는데 전국에 수없이 많지만 成都武侯祠, 古隆中武侯祠, 이곳 臥龍崗武侯祠 그리고 돌아가신 곳에 세운 五丈原武侯祠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① 입구에서 武侯祠까지

차에서 내리니 南陽의 諸葛亮 사당 武侯祠 입구에 “千古人龍”이라고 쓴 石坊이 우뚝 서 있다. 人龍이란 사람 가운데 龍이란 뜻이니 千古에 걸쳐 명성이 不朽하는 人中龍이란 뜻이리라. 입구의 左右에는 사자석상이 놓여있고 臥龍崗이란 현판을 지나니 “漢昭烈皇帝三顧處”라는 石坊이 있다. 昭烈帝는 劉備死後의 諡號니 유비가 그 옛날 이곳을 3번이나 제갈공명을 찾아 왔다는 뜻이다.

툭 터진 왼쪽의 땅은 당시 孔明이 농사를 짓던 躬耕田(궁경전)이고 오른쪽은 孔明이 마시던 우물인 諸葛井이 있는데 躬耕南陽汲水之處라고 되어있다. 궁경전으로 가는 입구의 바위에 劉禹錫의 陋室銘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글에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 孔子云何陋之有(산은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며 물은 깊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龍이 살아야 신령스러운 것이다…… 南陽의 초막이 누추했어도 諸葛亮이 살았고 西蜀의 亭子가 보잘 것 없어도 揚子雲이 거처했으니 德있는 君子가 거처한다면 공자께서도 어찌 누추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라 하여 이곳 南陽땅에 제갈량이 거처하여 명승지가 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붉은 색으로 되어있고 3개의 통로를 가진 山門에는 武侯祠라고 쓰여 있는데 1959년 곽말약이 쓴 것이다. 다시 石坊이 있는데 이곳에는 “三代遺才”라 題하였다. 이는 淸나라 康熙帝때 南陽知府 王維新이 쓴 글로 제갈량의 재능과 品德이 하은주 三代의 인물들인 伊尹, 呂尙 傅說등과 견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곳을 지나니 정원이 나오고 左右에 碑林이 있고 돌로 된 石坊 위에는 “韜略宗師”라 쓰여져 있다. 이 말도 王維新이 쓴 글인데 韜略(도략)이란 六韜三略의 준말로 군사를 쓰는 모략 또는 지혜에 있어서 후세의 사표가 될만한 人物이란 뜻이다.

이곳에는 1700여 년이나 된 柏樹(측백나무)와 楸樹(가래나무)가 우측과 좌측에 서 있는데 孔明의 명성이 千秋百代에 전해지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大拜殿(武侯祠)에는 가운데에 諸葛亮 우측에는 諸葛瞻, 좌측에는 諸葛尙의 상이 세워져 있고 舜業尹功, 勳모伊呂, 勳同伊呂, 伊呂遺風 등의 글이 쓰여져 있는데 공명을 三代때의 伊尹이나 呂尙(강태공)에 비유한 말들이다.

사당의 벽에는 한 장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유비가 머무르던 新野의 北에는 臥龍崗이 있고 남쪽 漢水를 건너 南郡에 隆中이 표시되어있다. 이는 南陽사람들이 유비가 三顧草廬한 장소가 隆中이 아니고 이곳 臥龍崗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붙여놓은 것으로 유비가 두 번째로 공명을 찾아갈 때 朔風[북풍]을 맞으면서 찾아갔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공명의 거처가 북쪽에 있어야만 그 사실과 맞는다는 것이다. 당시 유비가 공명을 찾아간 곳이 지금의 襄樊에 있는 隆中이냐 이곳 臥龍崗이냐 하는 논쟁은 천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역사적인 문제로 南陽 사람들은 出師表에 있는 “臣本布衣로 躬耕于南陽”과 隆中은 漢水의 南쪽에 있어 당시 南陽땅이 아니고 南郡이었다는 주장으로 南陽이 진짜 三顧處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 大拜殿에는 “心在朝廷하니 原無論先主后主요 名高天下어늘 何必辨襄陽南陽이리오(충성심이 조정에 있었으니 先主니 后主니 하는 것을 따지지 말 것이요, 명성이 천하에 자자하거늘 어찌 三顧處가 襄陽이니 南陽이니 하는 것을 따지리오)”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 이는 淸나라때 南陽의 知府를 지낸 顧嘉형(고가형)이 쓴 것으로 당시에도 諸葛亮 躬耕地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② 抗金名將 岳飛

武侯祠의 우측에는 岳飛가 쓴 前后出師表가 있다. 孔明은 서기 227년과 228년에 魏나라를 칠 때 后主 劉禪에게 前后出師表를 쓰고 北伐에 오르는데 그의 우국충정이 진실하고 간절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옛 선비들도 이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던 천하의 명문이다.

南宋시대 때의 抗金名將 岳飛는 1138년 8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남양을 지나다가 남양의 臥龍崗에 이르러 제갈량 사당에 참배를 하였다. 이날 비가 내려서 사당 안에서 머무르다가 제갈량의 출사표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다가 단숨에 제갈량의 前后出師表를 쓰고 나서는 “나의 가슴속의 억눌렸던 것을 조금 폈을 따름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이 岳飛가 쓴 出師表石刻은 글씨체가 龍飛鳳舞하며 剛健有力하여 武侯祠의 중요 역사문물로 자리 잡고 있다. 가이드는 孔明의 글, 岳飛의 글씨, 그리고 이것의 탁본은 三絶로써 天下에 이름이 나 있다고 하였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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