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예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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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예 2000년
  • 승인 2003.03.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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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곧 내 자신

의사전달 넘어선 글자문화 2000년

각 시대별 대표작품을 통해 2000여 년에 이르는 한국 서예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한국 서예 2000년'전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580-1300)에서 열린다.

예술의 전당이 서예관 개관(88년)이후 한국 서예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체계를 정립하기 위해 열어온 '한국 서예 특별전'의 완결편이기도 하다. 출품작 150점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공립박물관 개인 소장가 등 약 50곳에서 빌려왔다.
우리 나라에 한자가 건너온 것은 약 2000년 전인 기원 전후. 이후 한자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또는 '서예'라는 독특한 글자문화로 옛 선조들의 삶과 함께 했다.

한반도에 한자가 전래된 뒤 우리 선조들에게 글씨는 한 인간이 지닌 학문과 재수와 뜻을 뭉뚱그려 집적한 '바로 그 사람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금이야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니 글씨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지고 있지만, 몇 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글씨는 '마음으로 배우는 것'이라 하여 인간 됨됨이를 비추는 거울 같은 것으로 중시했다.

글씨 쓰는 사람에 관한 일화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시대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얘기다.

떡 장사를 해 아들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는 한석봉이 진득하게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깜깜한 밤, 불빛 한 점 없는 방안에서 자신은 떡을 썰고 아들에게는 글씨를 쓰게 한다. 가지런한 어머니 떡 썰기 앞에서 자신했던 제 솜씨가 얼마나 보잘 것 없었나를 깨우친 석봉은 마음을 다잡아 붓글씨에 매진해 전 조선을 석권한 고유 서체인 '석봉체'를 일구고 나아가 그 이름을 중국에까지 떨치게 된다. 명나라 대학자 왕세정이 "목마른 천리마가 시내로 달려나가는 것 같고 성난 사자가 바윗돌을 치는 것 같다"고 칭찬했던 석봉체 글씨는 선조가 1587년 판각한 뒤 전국에 반포해 교과서로 삼았던 <천자문>으로 우리 눈에도 낯익다.

전시는 시대별 서예 특징에 따라
·삼국시대 글씨의 세 가지 색채
·김생과 통일신라 서예의 국제성
·구양순풍의 선사탑비가 주류를 이루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기까지
·탄연과 고려 중기 서예의 다양성
·조맹부 서체의 수용과 안평대군 이용
·도학자들의 글씨
·향토색이 짙은 조선후기 개성적 서가들
·한국서예의 근대성 등 여덟개 시기로 나누어 구성됐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집필한 시첩(증원필), 안평대군 이용이 송설체로 쓴 '칠언절구', 조선조 시조작가 봉래 양사언의 '초서 두루마리' 등 처음 공개되는 명작들이 인본정신이 집적된 '민족예술'로서의 서예를 보여준다.

김영권(백록화랑 대표, 백록당 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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