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3)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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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3) - 윤창열
  • 승인 2004.05.2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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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농씨 유적지 여山鎭 □

증후을묘 관람 후 수주시에서 북쪽으로 50리 정도 떨어진 여山鎭(여산진)으로 이동했다. 수주에서 나온 현지 가이드가 수주에 대한 소개를 해 주었다.
수주는 춘추시대 이전부터 있던 姬姓인 隨國의 도읍지로써 2001년 縣에서 市로 승격하였다 한다(曾國과 隨國은 같은 나라로서 당시에 하나의 나라를 2개의 이름으로 불렀던 예는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晉을 唐이라고 부르고, 魏를 梁이라고 부르고, 南陽市에 있던 呂를 甫라고 하고, 山東 安丘에 있던 州를 淳于라고 부른 것 등이다).

인구는 258만명으로 桐柏山과 大洪山의 中間에 위치하고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어 “鄂(악)北糧倉”의 칭호가 있다고 한다. 특히 市의 남쪽에 있는 大洪山은 1988년 國務院에 의해 國家重點風景名勝區로 지정된 名山으로 한나라 때는 綠林山으로 불렀다.
서기 17년 王匡과 王鳳의 領導下에 이 산에서 봉기를 일으켰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綠林軍이라 부르며 이 세력은 후에 왕망의 新나라를 물리치고 후한을 건립하는 중추가 되었다.

(1) 神農牌坊과 神農文化廣場

여山에 진입해 神農大道를 따라 달리던 차가 멈추고 우리가 내려서 처음 마주한 곳은 “炎帝神農故里”라고 황금빛의 글자로 큼지막하게 써놓은 神農牌坊이었다. 이곳은 炎帝神農烈山名勝區로 들어가는 大門이다.

여山은 본래 烈山이라 했었고 烈山은 불을 놓아 산을 불태운다(縱火燒山)는 뜻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산을 불질렀다는 것은 신농씨가 火田경작을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처음 烈山이라 부르다가 음이 비슷한 여山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神農橋를 지나면 神農文化廣場이 나온다. 먼저 눈앞에 펼쳐있는 것은 古典風格의 누각인데 古風的인 烈山門과 四角樓가 광장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烈山門 入口의 우측에는 “制뢰사結網(제뢰사결망) 고覓(고멱)藥材大功大德” 좌측에는 “諡神農號烈山稱炎帝至上至尊”이라는 대련이 걸려있다.

광장의 中央에는 漢白玉으로 만든 神農雕像이 우뚝 서 있다. 손에는 五穀과 藥草를 잡고 있는데 風雨를 무릅쓰고 農業을 개발하며 “一日而遇七十毒”하던 그의 艱難辛苦를 후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듯 하였다.

호북성의 수주시 인민정부에서는 이곳이 神農의 출생지이고 성장한 곳임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90년 11월 “炎帝文化기(기)炎帝故里硏討會”를 개최하였고 1993년 6월 15일(음력 4월 26일, 이날은 신농씨의 탄생일로 알려져 있다) “中國湖北首 屆炎帝神農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매년 음력 4월 26일이 되면 수많은 신농씨의 후손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광장의 벽에는 이들이 방문하여 남긴 글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2) 炎帝神農紀念館

신농광장을 지나 오른 쪽으로 가자 돌로 만든 돼지, 돌로 만든 양과 문화대혁명 때 부셔버린 神農洞의 동굴 門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두 마리의 火鳥가 새겨져 있었다. 火鳥는 朱雀으로 神農이 火德으로 王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상징하고 있는 듯 하였다. 이를 지나니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은 모두 5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었다.

제1전시실에는 炎帝神農의 대형 油畵가 걸려 있고 양쪽에는 “華裔仰始祖 天下賴奇功(중국사람의 후손은 시조를 우러러보고 천하사람들은 위대한 공덕에 은혜를 입고 있다)”라는 대련이 쓰여 있었다. 전시실의 좌우에는 祭文이 걸려 있었다.

제2전시실에는 禮記·國語·左傳 등 140여종의 책에서 炎帝神農이 隨州 여山에서 탄생했다는 것과 그의 事迹을 기록하고 있는 영인본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여기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神農氏의 出生地가 岐山(어떤 책에서는 寶鷄)이라는 說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전부터 神農氏는 섬서성 寶鷄에서 태어나 호북성 烈山(여山)에서 성장하여 農業과 醫藥을 흥기시키고 湖南省 茶陵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머리 속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이곳이 神農의 탄생지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후세의 기록은 차치하고 고대의 기록만으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여山說의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國語·魯語에 “昔烈山氏之有天下也에 其子曰柱니 能殖百穀百蔬라(옛날 열산씨, 즉 여산씨인 신농이 천하를 다스릴 때 그 아들을 柱라 했고 온갖 곡식과 채소를 경작했다)”.
② 禮記·祭法에 “여山氏之有天下也에 其子曰農이니 能殖百穀이라”고 하였고 동한의 鄭玄은 注에서 “여山氏는 炎帝也니 起于여山이오 或曰有烈山氏라” 하였다.
③ 皇甫謐(鍼灸甲乙經의 저자)은 帝王世紀에서 “神農氏는 起烈山하야 謂烈山氏니 今隨여鄕也라”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미해결점이 하나 나오는데 神農氏가 姓으로 쓴 姜水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岐山說(寶鷄說)과 관련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 황보밀은 제왕세기에서 “炎帝神農氏의 母有喬氏女登이 遊華陽(華山之南)이라가 感神而生炎帝하고 長于姜水하야 因以氏焉하니라(염제신농씨의 어머니 유교씨 여등이 화산의 남쪽에서 놀다가 神의 감응을 받아 염제를 낳았고 강수에서 자라 姜氏로 성을 삼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姜水의 위치만 밝힌다면 神農의 출생지는 자명해진다. 姜水는 岐水의 支流로 지금의 岐山縣 동쪽에 있다. 《水經注》에서 “岐水又東하야 逕姜氏城南하야 爲姜水라” 하였다.

필자가 姜水에서 태어나 여山에서 생활했다는 근거로 삼은 것은 桓檀古記이다. 환단고기의 三韓管境本記에 “熊氏之所分曰少典이니 安夫連桓雄之末에 少典이 以命으로 監兵于姜水하고 其子神農이 嘗百草制藥이오 後에 徒烈山하야 日中交易하니 人多便之라(배달국 초기 熊族의 후손 중에 소전이 있었는데 배달국 8대 안부련환웅의 말기에 명을 받아 강수에서 군사를 감독하였고 그의 아들 신농이 百草를 맛보아 약을 만들었고 후에 烈山으로 이주하여 대낮에 시장을 열어 물건을 교환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라 하였다. 어쨌든 이 문제는 더 많은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

이곳에서 또한 신농씨의 업적을 8가지로 요약해 놓고 있었는데 ① 制뢰사(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든 것), ② 敎耕耘(밭을 갈고 김 매는 것을 가르친 것), ③ 嘗百草(온갖 풀을 맛본 것), ④ 療民疾(백성의 질병을 치료한 것), ⑤ 馴禽獸(산 짐승을 잡아다 길들여 가축으로 기른 것), ⑥ 創編織(베 짜는 것을 창시한 것), ⑦ 興貿易(시장을 열어 물건을 교환하게 한 것), ⑧ 制歷時(달력을 만든 것) 등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보면 神農은 이 외에도 “神農耕而作陶(太平御覽)”라 하여 陶器를 창시했고 “削桐爲琴 繩絲爲弦(藝文類聚)”라 하여 현악기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다.

제3전시실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돌도끼(石斧), 돌칼(石刀), 돌낫(石겸) 및 陶器 등의 문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제4전시실은 신농열산名勝區의 모형도를 전시하고 있었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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