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2)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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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2) - 윤창열
  • 승인 2004.05.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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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武漢에서 隨州까지 □

8월 8일, 무한을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隨州를 향해 차를 달렸다. 가이드는 오늘도 예외 없이 중국의 정황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었다.

▶ 역사를 잃어버린 土家族

중국의 전 국토는 960만㎢이고 광역행정구역으로 23개의 省,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북경, 상해, 천진, 중경)에 2개의 특별행정구(홍콩, 마카오)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장강 유역이 황하유역보다 출토되는 문물도 더 많고 더 오래 되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고대의 문화유적을 수없이 파괴하고 10년간 공포의 시대를 열었던 모택동이 지금도 중국사람들이 추앙하는 것은 그가 중국을 통일하고 대약진운동으로 먹고사는 것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소수민족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는데 중국에 있는 56개 소수민족을 합하면 1억 명이 조금 넘으며 조선족은 220만 명에 이르는데 소수민족 가운데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4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삼협댐을 만들어 장강 주위가 수몰될 때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속에는 고문자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자를 썼던 민족의 후손인 土家族도 조상의 문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斷絶, 조상들의 유산을 계승하지 못하고 大中華의 물결 속에 동화된 민족, 主體性을 確立하고 正體性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土家族의 선조는 巴人인데 이들의 활동무대는 重慶이 근거지였다. 巴人들은 우리민족처럼 호랑이를 대단히 중시한다고 한다.

▶ 孝感의 由來

버스는 孝感을 지나고 있었다. 옛날에 읽었던 孝感縣의 유래가 생각난다. 秦나라 때(東漢이라는 설도 있다) 董永이라는 사람이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을 했다.
고향에 전쟁이 나서 그는 아버지를 따라 피난을 했는데 山東에서 河南으로 갔다가 다시 湖北의 安陸까지 갔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도 많고 몸이 약해 춥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자 병들어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董永은 타향에서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었으며 돈마저 없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자노인에게 애걸하여 돈을 빌렸고 또 그에게 “내가 당신 집에서 머슴을 살아 당신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에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노동을 하였고 매일 거친 밥을 먹으면서 2년이 채 되기 전에 빌린 돈을 다 갚아 버렸다.

당시의 사람들은 董永이 고생하면서 효도를 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安陸縣이라는 명칭을 孝感縣으로 바꾸어 董永을 기리고 또한 후세사람들이 孝道를 행하기를 권면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孝感市에는 董永의 무덤과 董永公園 등이 있어 2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들을 깨우치고 있는 것을 보면 孝者는 百行之原也라고 한 말이 虛言이 아님을 실감한다.

▶ 石膏의 고장 應城, 이태백의 제2 고향 安陸

효감을 지나니 왼쪽으로 가면 應城市로 간다는 이정표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雲夢으로 가야 한다. 應城은 石膏가 유명한 지방이다. 應城石膏공장은 역사가 오래 되었고 여기서 생산되는 白色의 섬유석고는 중국내외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그리고 석고베개는 이 지방의 명품이라고 한다.

雲夢을 지나 安陸市로 접어들었다. 아마 옛날 安陸을 孝感으로 바꿀 때 安陸의 일부분 땅만을 孝感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길옆에 “安陸은 李白의 第二의 故鄕”이라는 안내판이 시선을 끈다.
이백은 20세 때 사천지방을 유람하고 25세에 칼을 차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고향을 떠나 유람할 때 먼저 안륙에 들려 머물렀다고 한다.

우리는 수주에 도착할 때까지 神農架林區에 대한 비디오를 보았다. 물 맑고 경치가 좋으며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땅으로 많이 관광오라는 홍보비디오였다. 神農架林區는 호북성의 서부에 있는데 이 지역 내에는 大神農架, 小神農架, 神農頂 등 신농씨와 관련된 지명이 있고 신농씨의 採藥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曾侯乙墓의 현장

우리는 수주에 도착하자 곧바로 증후을묘의 현장을 방문하였다. 증후을묘는 궐水의 西岸에 있는 뢰鼓墩에 있는데 뢰鼓墩이란 북을 치던 언덕이란 뜻으로 초 莊王(B.C 614~591)이 반란을 일으켰던 令尹 鬪越椒를 추격하여 이곳에 이르러 접전을 할 때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서 용기를 북돋우었다 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100여 개의 무덤이 산재해 있는 무덤群 지역으로 증후을묘는 뢰鼓墩一號墓로 명명되어 있고 더 많은 발굴이 기대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발굴한 터 위에 건물을 지어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해 놓고 돌아가면서 무덤의 본래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무덤은 東室, 中室, 北室, 西室의 넷으로 되어 있고 각 실을 막고 있는 칸막이의 아래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어 서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죽는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혼은 남아서 生時와 같이 삶을 유지한다는 옛사람들의 生命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네 개의 槨室은 地下宮殿의 모습을 띠고 있다.

東槨室에서는 曾侯乙의 棺과 부장관(陪葬棺)8개, 개를 순장시킨 관 1개, 그리고 金玉器, 漆木器와 약간의 武器, 樂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증후을의 外棺 뚜껑에는 1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槨室을 연결하던 통로처럼 靈魂의 출입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다.

부장관 안에 있는 뼈들은 모두 20여세 정도의 여성들로 판명이 되었는데 증후을이 살아 있을 때 모시던 侍妾들로 생각되며 순장한 개는 증후을의 愛犬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中槨室에는 禮器와 樂器의 대부분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거대한 編鐘과 編磬·九鼎八궤 등이 여기에 묻혀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동곽실은 침실에 해당하고 중곽실은 연회를 열던 장소였으리라 생각된다.

西槨室에서는 부장관 13개 외에는 별다른 것이 나오지 않았는데 순장된 사람의 연령이 동곽실보다 어리고 모두 미성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악기의 연주자이거나 춤을 추던 사람들로 추측된다. 北槨室에는 兵器·車馬器·갑옷·투구 외에 240매의 죽간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葬儀物品·葬儀規模 등이 기록되어 있다.

증후을묘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 중에서 압권은 당연 編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종은 현재 중국의 國寶로 지정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世界第八大奇迹”이라고 예찬하고 있다. 鐘과 鐘架(종 틀)에는 모두 3755字의 銘文이 새겨져 하나의 音樂전문서적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계속>

윤 창 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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