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1)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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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1) - 윤창열
  • 승인 2004.05.0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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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岡市 東坡赤壁 □

우리는 점심을 먹고 黃岡市에 있는 東坡赤壁을 향해 출발하였다. 광역의 黃岡市는 11개의 縣·市·區를 관할하고 있는데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共産主義 혁명가와 장군을 많이 배출한 市라고 하는데 장군은 300명을 넘게 배출했다고 한다.

필자가 대충 자료를 찾아보니 정말로 혁명가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紅安縣에서는 中國共産黨 創始者 중의 하나이며 국가주석을 지낸 董必武와 역시 국가주석을 지낸 李先念 그리고 223명의 共和國將軍을 배출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세계 역사에서 거의 전례가 없는 것으로 紅安은 이 때문에 將軍縣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기春縣에서는 李時珍을 위시하여 淸代의 文史學家 顧景星, 學問의 大家 黃侃, 文藝理論家 胡風 등이 출생하였고 20세기 이후 500여명의 전문가, 교수, 학자들이 태어나 敎授縣이라는 美稱을 얻었다.

이 밖에 羅田縣에서는 元末 농민기의군의 首領인 徐壽輝, 英山縣에서는 活版을 만든 畢升, 희水縣에서는 聞一多, 武穴市에서는 禪宗의 四祖인 道信, 團風縣에서는 초기 공산당원 包惠僧, 중국의 세계적인 지질학자 李四光, 哲學家 熊十力, 軍人 林彪 등이, 그리고 黃州에서는 中國共産黨의 初期 지도자인 陳潭秋 등이 출생하였다.

특히 黃梅縣에는 禪宗의 四祖 道信과 五祖 弘忍이 머물렀던 四祖寺, 五祖寺가 있고 6祖 慧能도 이곳에서 法을 전수 받아 禪宗史에 있어서는 대단히 유서 깊은 곳이다.

▷ 東坡赤壁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중국 시골의 농촌 풍경을 창가로 바라보면서, 그리고 이따금 졸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黃州의 서북쪽에 있는 東坡赤壁이었다. 蘇東坡는 元豊3년(1080년) “烏臺詩案”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출옥한 이후 黃州團練副使로 황주에 貶職되어 내려왔다. 그는 45세에서 48세(1083년)까지 머물면서 前·後赤壁賦와 《念奴嬌·赤壁懷古》 등의 名篇을 지어 赤壁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하였다.

소동파는 前赤壁賦에서 이곳이 조조와 주유가 전쟁을 하던 곳이라 했지만 고증에 의하면 赤壁의 古戰場은 포기현(蒲圻縣)의 서북쪽에 있던 赤壁山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곳 蒲圻뿐만 아니라 武昌의 동남쪽과 黃岡에도 赤壁이란 명칭이 동시에 존재하여 蘇東坡가 혼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蒲圻縣은 현재 아예 赤壁市로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이곳 호북성의 사람들은 서기 208년 孫劉의 연합군이 조조를 격파한 적벽을 武赤壁이라 하고 소동파가 賦를 읊은 동파적벽을 文赤壁이라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동파적벽은 단순히 적벽 혹은 바위의 모습이 장강을 바라보는 코와 흡사하여 赤鼻라고 불렀는데 청나라 강희년간에 黃州知府 郭朝祚가 처음 東坡赤壁으로 定名하였다.
매표소에는 東坡赤壁이 二堂(二賦堂, 雪堂), 三樓(棲霞樓, 涵暉樓, 읍爽樓), 二閣(碑閣, 留仙閣), 一齋(慨然齋), 一像(東坡塑像), 一峯(剪刀峯), 九亭(放龜亭, 睡仙亭, 坡仙亭, 뢰江亭, 問鶴亭, 快哉亭, 覽勝亭, 望江亭, 羽化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 二賦堂, 放龜亭, 睡仙亭

매표소를 통과하여 걸어 들어가니 蘇東坡의 立像이 우뚝 서 있는데 전국에서 제일 큰 立像이라고 한다. 머리를 들어 멀리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새로운 시상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는 작가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계단 입구를 통과해 들어가면 二賦堂인데 이 편액은 李鴻章이 쓴 것이라 한다. 안의 前面에는 1922년 程之楨이 쓴 前赤壁賦가 새겨져 있고 後面에는 근대사람 李開侁이 쓴 後赤壁賦가 새겨져 있다.

벽에는 民國의 大統領인 徐世昌이 쓴 詩와 前後赤壁賦가 있는데 그는 20년간 소동파의 서법을 연마하여 이 글을 썼다고 하다. 이곳을 나오면 붉은 돌탑이 하나 있는데 탑 아래 무고한 少女의 원魂이 눌려져 있다 하여 사람들은 그 탑을 원塔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는 곧장 아래쪽으로 걸어 赤壁磯의 끝인 放龜亭에 이르렀다. 정자에서 보니 아래의 물 속에 돌로 된 흰 거북이의 등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동진시기에 將軍 毛寶戌이 주城을 수비할 때 그의 하인이 그가 사서 기르던 흰 거북이를 이곳에서 放生을 했는데 6년 후 전쟁이 나 적에게 쫓기다 수많은 사람이 이 곳에서 투신을 해서 다 죽었는데 이 하인만은 흰 거북이가 자신을 업고 뭍으로 나와 살려주고는 되돌아가 보은했다고 하다.

아래의 거북은 明代의 知府 郭鳳儀가 1549년에 장인을 시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올라오면서 오른 쪽에 睡仙亭이 있는데 안에는 돌로 된 베개와 침대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蘇軾이 술에 취하면 이곳에서 잠을 자곤 했다고 한다.

▷ 坡仙亭, 뢰江亭, 留仙亭

더 올라오면 坡仙亭이 있는데 소식이 친히 쓴 《念奴嬌·赤壁懷古》와 친히 그린 月梅, 壽星像 그리고 郭鳳儀가 그린 東坡老梅 등이 있고 뢰(술 부을 뢰)江亭에는 강희제가 원나라 때 서예가인 趙孟부의 필체로 쓴 前赤壁賦가 있는데 위에 御書라 되어 있다.

이 정자 안에는 1863년 1월 1일 85세 된 葉志詵이 붓을 떼지 않고 一筆로 쓴 “壽” 字가 있는데 윗면은 학의 머리처럼 보이고 아래는 지팡이처럼 보이는데 글씨와 그림이 合一된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85세 노인의 글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筆力이 있었으며 가이드는 이 글자와 사진을 찍으면 누구도 85세 이상을 산다고 하여 우리 모두는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留仙閣은 1884년 소식의 생일날인 12월 19일 준공하였는데 소식의 혼이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오래 머물러 달라는 뜻으로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한다.

▷ 東坡라는 號의 由來

우리는 이 밖에 소동파의 친필 필체가 남겨져 있는 碑閣, 棲霞樓 등을 둘러보고 휴식을 가졌다.
소식이 東坡라 호를 쓴 곳이 이곳 黃州인데 그는 46세 되던 해(1081년)에 동쪽 교외의 황폐한 땅에 농사지으면서 이곳을 東坡라 이름했고 다음해 2월 東坡에 雪堂을 짓고 이곳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東坡居士라 號했다고 한다.

그의 前赤壁賦와 後赤壁賦는 이해 지은 것으로 豪放한 기상은 天馬가 行空하는 것과 같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讀赤壁兩篇賦 勝讀一部莊子(전후 적벽부를 읽는 것이 장자를 한번 읽는 것 보다 낫다)”라고 하여 글의 雄渾함과 언어의 압축미를 격찬하고 있다.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여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안개 속에서 사물을 보다가 안개가 걷히면 사물이 뚜렷이 드러나듯 역사적인 사실이 현실감 있게 우리의 머리 속에 각인이 되게 하는 체험의 현장인 것이다.

아마 이러한 즐거움과 지적탐구가 여름만 되면 나를 중국으로 이끌고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날의 일정은 이것으로 마무리 짓고 우리는 무한으로 돌아와 1박을 하였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필자약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저서 : ‘증보 중국의학사’ ‘난경연구집성’ ‘詳解의학한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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