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0)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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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0) - 윤창열
  • 승인 2004.04.3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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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時珍陵園 (전회에 이어) □

⑤ 墓區

百草園을 지나 마지막에 있는 이시진의 무덤을 찾아가다가 우리 팀은 回春閣이라 쓴 조그만 사당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사당에는 성금을 몇 푼 내고 제비를 뽑으면 도사가 점을 처 주기도 했다.
나도 하나를 뽑았는데 점괘의 내용이 “第十簽·上中·上油三斤·家宅”이라 하고는 “人逢喜樂精神爽 家道安康樂更多 興隆旺氣從今始 萬般如意慶高歌”라 되어 있었다.
재미 삼아서 본 것이지만 七言絶句로 된 내용이 좋았다. 아마도 좋은 내용으로만 점사를 만들었을 것 같다.

무덤은 마주보면서 좌측은 이시진과 그의 부인 吳氏의 합장묘였고 우측은 그의 아버지 이언문과 어머니 장씨의 합장묘였다.
李言聞은 2남1녀를 두었는데 長子 果珍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고 둘째 아들이 李時珍이다.
李時珍은 4남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李建中, 둘째가 李建元, 셋째가 李建方, 넷째가 李建木인데 막내 李建木은 형님 李果珍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이시진의 아들과 손자(李氏四賢)

맏아들 建中은 擧人이 되어 河南 光山縣의 敎諭가 되었을 때 받은 녹봉의 많은 부분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보조하였다.
萬曆3년(1575년)부터 四川 蓬溪의 知縣과 安岳縣令·遂寧縣令 등을 지냈는데 “抑豪强 淸兼幷 汰積書”하고 오래된 사건들을 처리하고 원통한 사건들을 잘 해결하여 백성들이 그를 “李靑天”이라고 불렀다.
潼川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이건중은 푸른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청렴하게 고을을 다스렸으며 몸소 백성들의 상황을 살펴 당지의 사람들이 오랜 가뭄에 내리는 큰 비를 “李公雨”라고 불렀다 한다.

이건중은 아버지의 본초강목 출판을 돕기 위해 3차례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서찰을 조정에 올렸고 1587년 이시진의 나이 70세 때야 기州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집에 돌아올 때 변변한 물건 하나가 없었는데 그의 청렴함은 다시 한번 佳話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는 돌아 온 후 본초강목의 출판을 도왔다.
최초의 본촌강목 판본인 金陵本(祖本)의 輯書姓氏中에 “雲南永昌府通判男李建中”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본초강목 附圖에도 또한 “階文林郞(文林郞은 文官 正七品에 해당된다) 蓬溪知縣男李建中輯”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李建中의 손자 李雲慶도 擧人이 되어 福建將樂縣·泰寧縣의 知縣을 역임했는데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단지 보따리 하나만 어깨에 메고 있어 전송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금치 못했다 한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두 청렴결백하여 사람들은 “醫聖門中兩淸官”이라고 칭송을 하였다.

둘째 아들 李建元은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鄕試에 낙방하자 아버지를 따라 醫術을 베풀었다.
그는 이시진의 본초강목 편찬을 곁에서 항상 도왔으며 아버지의 유촉을 받들어 이시진 사후 3년째 되는 1596년 單騎로 北京에 가서 이시진이 남긴 遺表와 本草綱目을 神宗皇帝에게 올렸다. 神宗은 곧 간행하여 세상에 보급할 것을 명령하였다.

막내아들 李建木은 욕심이 없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역사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길에서 金을 줍고는 날이 저물도록 가지 않고 주인을 찾아주었으며 1608년 큰 홍수가 나서 굶어죽는 자가 길에 넘치자 죽을 쑤어 먹여 수백 명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세상을 떠남에 鄕賢祠에서 제사를 지냈다. 아들이 없어 李建中의 아들 李樹初가 양자로 들어갔다.

李樹初(1587~1643)는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출중하였다. 1619년 進士에 합격하여 戶部主事를 역임했고 외직으로 나아가 陽和府를 맡아 다스렸고 山西按察副使로 승진하여 赤城 등의 고을을 순시하였다.
이수초는 공적이 많고 민중들의 추앙을 받아 陽和·赤城 등의 고을에서는 사당을 세워서 그를 제사지냈다.
얼마 뒤에 그는 고향 기주에 돌아와 雨湖에서 낚시도 하고 한가하게 전원생활을 즐겼다.

1635년 張獻忠의 農民起義軍이 기주로 쳐들어오자 그는 재산을 다 털어 기주성을 수리하고 城을 방어하였다.
1643년 장헌충의 부대가 기주를 기습했을 때 이수초와 둘째 부인 封宜人, 큰 아들 延慶, 그리고 큰 아들과 둘째 아들 具慶의 아들 5명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둘째 아들 具慶은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妻 吳氏의 도움으로 死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훗날 李時珍, 李建中, 李建木, 李樹初의 3代 四人은 사람들에 의해 “李氏四賢”으로 칭송을 받았고 후대에 이곳 사람들은 “四賢坊表碑”를 이곳에 세워 이들의 업적을 宣揚하였다.

□ 醫中之聖 李時珍 □

李言聞의 무덤 앞에는 1572년에 李果珍과 時珍이 세운 묘비가 있고 李時珍의 무덤 앞에는 李建中, 建元, 建方이 세운 묘비가 서 있다.
묘를 둘러보고 우리는 묘 앞에 세워 놓은 이시진의 半身塑像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였다.

다시 塑像 앞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이 앞에 이시진을 기념하는 靑石牌坊(패방은 중국에서 공 있는 사람을 기념하거나 美觀을 위해 세운 문짝 없는 문)이 우뚝 서 있다.
앞면에는 醫中之聖이라는 네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科學之光이라는 네글자가 새겨져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우리들은 상점에 들려 의학과 이시진에 관련된 여러 책들을 구입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나오는 回廊의 가에는 기竹과 기艾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피곤함을 위로하듯 夾竹桃花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 인간중의 보배였던 이시진의 뜨거웠던 열정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李時珍家方補酒

우리는 버스를 타고 점심식사를 할 기春縣城으로 향했다. 李時珍大道를 다 나오면 바로 長江과 마주한다. 가이드는 지금 이곳에는 이시진의 후손들만이 모여 사는 李氏마을도 있다고 하였다.

점심식사를 하는데 蓮根이 나왔다. 蓮根은 이곳의 특산품으로 다른 곳의 연근은 보통 구멍이 7개인데 이곳은 구멍이 9개이므로 특별히 總明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연근을 먹으면 귀도 밝아지고 눈도 밝아진다는 뜻으로 이렇게 명명한 듯 하다.

술도 나왔는데 本草綱目표 “家方酒”라고 되어 있다. 설명서를 보니 원명은 “李時珍家方補酒”이고 민간에서는 “李時珍家酒”라고 한다고 한다.
이 술은 400여 년간 단절이 되었다가 1997년 明代 《荊王府(지금의 기春)記事》라는 책을 통해 뜻밖에 발견되어 이듬해 회사를 만들어 대량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그 내용에서 우리는 서유기의 저자 吳承恩을 만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시진 처방덕에 서유기 완성한 吳承恩

1572년 가을 이시진은 太醫院(지금의 북경) 院判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본초강목을 저술하였다. 荊王은 그를 위해 술자리를 베풀고 환영연을 베풀어주었다.
이 때 荊王府記善(明代 親王의 屬官으로 강의하는 일을 담당) 吳承恩(1504 ~1582)도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이시진은 오승은의 신체가 허약한 것을 보고 그의 家酒를 처방해 주었다.
이 처방은 기春四寶를 포함한 32종의 약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大輔元氣·滋陰壯陽·强筋壯骨하는 효능이 있어 사실은 자신도 조제하여 마시던 술이었다.

이시진도 모든 精力을 소비하여 본초강목을 저술하고 76세까지 살았고, 근 70세에 이르러(당시 69세) 병약한 몸이었던 오승은도 이후 고향인 江蘇 淮安으로 돌아가 서유기를 저술하고 79세까지 살았다.
이 모든 것은 둘 다 李時珍家方酒의 德이었다고 하니 이시진의 家方補酒가 없었다면 서유기도 없었다는 전설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닌 듯 하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서유기에는 기春의 풍속, 지명, 荊王府를 비유한 상황 등이 여러 곳에 묘사되어 그의 기春에서의 생활이 서유기 저술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계속>

필자약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저서 : ‘증보 중국의학사’ ‘난경연구집성’ ‘詳解의학한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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