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8)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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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8) - 윤창열
  • 승인 2004.04.0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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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州는 본시 의약지향(醫藥之鄕) □

필자가 중국의 地理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20년도 더 되지만 구체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1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학교에서 중국의학사를 강의하면서 각 의가들의 고향과 활동하던 곳을 중국지도를 보면서 하나하나 표시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뒤 1993년 자매대학인 요령중의학원에서 1년을 지내면서 중국의 省·市·縣에 대하여 많이 공부를 하여 유명인물의 고향이 어디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졌고 이러한 결과들이 쌓여서 지금의 의학유적 탐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기春과 기州의 기는 “근”, “芹”과 같은 뜻으로 이 땅에서 芹菜(미나리)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서 “芹菜二月生苗”라 했는데 2月은 봄이 오는 때이므로 “기春”이란 두 글자는 “기(芹)菜逢春”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字가 藥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주에는 이시진 외에도 뛰어난 의학가가 다수 출현하였다.

北宋시기에 대문학가 소동파는 醫道에도 깊이 통하였었는데 그가 黃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 항상 기주에서 관할하던 기水麻橋(지금의 희水縣 麻橋鎭)의 名醫를 방문하였는데 바로 《傷寒總病論》으로 유명한 龐安時(字 安常)이다.
방안시가 세상을 떠난 후 백성들은 그를 기념하여 희水縣城에 藥王廟를 건립했는데 사당안에는 그와 소동파가 대화하는 모습의 塑像을 세웠다.

明代에 羅田縣은 기주에서 관할하였는데 이곳에서 유명한 醫家인 萬全(1488~1580, 字 密齋)이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만전은 이시진보다 30년 먼저 태어나 13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특히 부인과와 소아과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幼科發揮》, 《痘疹世醫新法》, 《彙成保命歌括》, 《養生四要》, 《廣嗣精要》, 《女科彙要》, 《痘疹格致要論》, 《痘疹啓微》, 《傷寒摘錦》 등을 지었는데 외국어로 여러 권이 번역되었고 청나라 초기에는 조정에서 醫聖으로 封해졌다.
강희 47년에 羅田縣의 知縣은 그를 위해 무덤을 重建하고 墓碑를 세웠다고 전한다.

廣濟縣(지금의 武穴市)은 기춘현과 이웃해 있고 명대에 역시 기주에서 관할하였다.
기춘현과 광제현의 경계인 橫崗山의 꼭대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완만하게 起伏하는 山溝가 있는데 이를 百家園이라고 부른다.
이 百家園은 명나라의 개국황제 朱元章이 명장 楊廣에게 封地로 하사한 땅이다.
청대에 이르러 楊廣의 5대손 楊少山은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當地의 名醫가 되었다.
楊少山의 아들 楊際泰는 의술이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나 호북성 동쪽의 여러 현과 장강중류 일대의 “客集衣冠道也遮(환자가 몰려들어 옷과 관이 길을 막았다)”하는 名醫가 되었다.

그가 지은 의학 저작으로는 《醫學要述》 11권이 있다. 기주가 醫藥之鄕이 된 데는 이곳에서 藥材가 풍부하게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약재는 600여종에 이르지만 이곳의 地道藥材(道地藥材라고도 하며 본고장에서 나는 진짜 약재를 말한다)로는 기艾·기蛇·기龜·기竹의 기州四寶 外에 杜충·桔梗·紫蘇·丹蔘·蓮藕 등이 있다.

□ 李時珍陵園 □

李時珍大道를 따라 이시진 능원을 향해 가는데 왼쪽에 李時珍醫院門診部가 보이고 위에는 玄妙觀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시진과 그의 아버지 月池 李言聞은 도교사원인 玄妙觀안에 진료실을 설치하고 당지의 백성들을 치료하였다.
1970년 현묘관이 심하게 파괴되자 이를 뜯어버리고 1980년대 국가위생부에서 자금을 대어 원터의 서북쪽에 다시 현묘관을 세우고 이를 李時珍醫院門診部로 삼은 것이다.
이시진능원은 藥物碑廊·李時珍記念館·藥物館·百草藥園·墓區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藥物碑廊

山門(記念館 大門)을 들어서면 바로 廊院이다. 山門에는 鄧小平이 “李時珍記念館”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廊院의 양쪽에는 80m의 長廊이 펼쳐지는데 內壁에 顧景星이 쓴 李時珍傳, 王世貞이 쓴 本草綱目序, 그리고 128種의 本草藥圖가 새겨져 있다.
顧景星(1621~1687)은 이시진 보다 28년 늦게 기주에서 태어난 대학자로 우리는 그가 쓴 李時珍傳을 통해 이시진의 가계와 어렸을 적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時珍의 字는 東壁이오 祖는 某요, 父는 言聞이니 世孝友하고 以醫爲業하니라 時珍이 生에 白鹿이 入室하고 紫芝産庭이오 幼以神仙自命하니라 年十四에 補諸生하야 三試於鄕이나 不수라 讀書十年에 不出戶庭하고 博學하야 無所不규러니 善醫하야 卽以醫自居하니라”

이를 보면 李時珍은 世醫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평범한 의사집안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대대로 가정에서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醫業을 계승한 집안이라 하였으니 아마 이러한 家風과 蔭德으로 이시진같은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白鹿入室은 이시진의 아버지 李言聞이 그의 부인이 이시진을 분만할 때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한 마리의 흰 사슴이 입에 靈芝를 입에 물고 곧장 방안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었다는 傳說이 전하며 紫芝産庭은 자주색의 영지가 정원에서 생겨난 것으로 모두 상서로운 징조이다.
그리고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神仙으로 자처한 것을 보면 역시 평범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14살에 補諸生은 縣試에 합격하여 生員(秀才)이 되어 縣學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고 三試於鄕不수는 3번이나 省에서 보는 시험을 보았지만 모두 낙방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縣試에 합격한 자를 生員이라 하고 鄕試(省試)에 합격한 자를 擧人이라 하고 3년마다 정부에서 실시하는 會試 또는 殿試에 합격한 자를 進士라고 하는데 이시진이 擧人도 못 되었다는 것은 그의 운명이 벼슬할 팔자가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그 후 그가 10년 동안 문밖에도 나가지 않고 글을 읽었다 하니 이것이 그가 《본초강목》을 쓰는 밑바탕이 되었으리라. 본초강목에는 총 1892종의 약재가 실려있고 이중 1160개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곳에는 128종류를 묘사하고 있다.

② 記念館

本草碑廊을 지나가면 記念館이다. 기념관은 U자형의 2층건물로 들어가면서 左側에 明나라 때 기州城의 模型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白色의 石膏로 만든 이시진의 塑像이 있고 그의 위대한 일생, 탁월한 공헌, 후세에 미친 영향 등 3개 부분으로 나누어 전시를 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瓦硝패로써 이 기념관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이라 한다. 그는 35세 되던 1552년에 본초강목의 저술을 시작해서 회갑이 되던 61세(1578년)때 완성을 하였으니 총 27년의 시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본초강목은 모두 190만 자로 되어 있고 800여 종의 서적을 인용하고 있는데 직접 인용한 문헌만도 758部에 이른다.
그의 본초학에 대한 공헌은 첫째 조금이라도 불합리한 내용 등은 가차없이 비판을 한 것이고, 둘째 前人들의 약리학설을 모두 吸收하고 百病主治藥條를 만들어 辨證論治에 따라 약물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셋째 새로운 약재를 대량으로 추가하였고, 넷째 과거의 의가들의 본초에 대한 理論과 약물운용 등과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여 후학들이 참고하고 선택하는데 편리하게 한 것들이다. <계속>

필자약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저서 : ‘증보 중국의학사’ ‘난경연구집성’ ‘詳解의학한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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