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5)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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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5) - 윤창열
  • 승인 2004.03.1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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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황학루 전경 ② 서기 2000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밀레니엄종(千禧鐘) ③ 曾侯乙墓의 출토문물이 전시되어 있는 호북성박물관 ④ 증후을묘의 주인공 乙의 복원상. 이 頭像은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 및 고인류연구소에서 복원한 것이다.


③ 황학루의 전설과 유래

1층의 홀은 높이가 10여 미터에 이르고 기둥에는 대련으로 “爽氣西來에 雲霧掃開하니 天地감하고 大江東去에 波濤洗淨古今愁라(상서로운 기운 서쪽에서 옴에 구름과 안개가 걷히니 천지가 진동하고, 장강이 동쪽으로 흘러감에 그 파도는 고금의 근심을 씻어 깨끗이 한다)”라는 楹聯이 걸려 있다.
또 홀 중앙에는 거대한 《白雲黃鶴》의 벽화가 역시 도자기 벽돌로 그려져 있다.
이는 귤껍질로 학을 그렸다는 故事에서 내용을 끌어온 것으로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江夏(지금의 武昌)에 신유비(辛猷丕)라는 사람이 술집을 열었는데 신유비는 사람이 관대하고 마음 씀씀이가 구차하지 않았다. 어느 날 여동빈은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의 모습으로 와서 술과 요리를 잔뜩 시켜서 먹고는 외상을 하였다. 그 뒤에도 이 노인은 사흘이 멀다하고 찾아와서는 실컷 먹고 마셨고 그 때마다 외상을 하였다. 그러나 신유비는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여섯 달이 지나 그 노인은 다시 와서 외상값을 물어보니 한 3천냥쯤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도 다시 외상술을 시키자 주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술과 안주를 올렸다. 노인은 술을 먹고 나서는 노란 귤 껍데기를 가지고 술집 담장에 학 한 마리를 그려 놓고는 주인에게 말했다. ‘이 학이 내 대신 빚을 갚아 줄 걸세. 다음부터 손님이 와서 손벽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 이 학이 나와서 춤을 출 것이고 장사가 잘 될 것일세’ 신유비는 믿지를 않았지만 노인이 떠난 뒤에 손님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다. 한 사람이 시험삼아 손벽을 치며 노래를 부르자 과연 담장에 그린 학이 안으로 들어와 춤을 추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면 다시 담장으로 돌아갔다. 소문은 빨리 펴졌고 신유비의 주점은 강하현의 명물이 되었으며 신유비는 큰 돈을 벌었다. 10년이 지난 어느날 여동빈은 다시 와서 쇠로 된 피리를 불자 즉시 흰 구름이 날아들고 학 또한 날면서 춤을 추자 여동빈은 학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신유비는 이를 기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웠다.”

그런데 학을 타고 간 신선이 呂洞賓으로 된 것은 元代 道敎 全眞派가 興起한 이후의 일이다.
《南齊書》에는 王子安이라 하였고 당나라 때 閻伯理가 쓴 《黃鶴樓記》와 송나라 때의 《太平환(환)宇記》에는 費褘(字 文偉)라고 하였고 또 荀襄이라는 說도 있다.
明代의 大文豪 王世貞 汪雲鵬이 지은 《列仙全傳》에는 신선 費褘가 귤껍질로 학을 그렸고 辛猷丕가 누각을 지었다는 故事가 기록되어 있다.
이 고사는 위에 呂洞賓으로 기록된 고사의 원형이다.

그러나 費褘는 三國時代 劉備에게 의탁하여 太子舍人벼슬을 지냈고 劉禪이 繼位한 후에는 黃門侍郞·尙書令·大將軍 등의 벼슬을 지낸 人物로 서기 254년 다른 사람에게 殺害를 당한다.
지금의 正說은 이곳은 옛날 백조가 겨울을 나던 곳으로 백조를 옛날에는 黃鵠으로 불렀다 한다.

그래서 옛 문헌을 보면 지금 武昌의 蛇山 및 강에 인접한 곳을 黃鵠山 및 黃鵠磯라 부렀고 鵠(곡)과 鶴은 音이 비슷하고 옛날에 通用을 했기 때문에 黃鶴樓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1층 홀의 도자기 벽화는 “昔人已乘黃鶴去”의 낭만적인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학은 두 날개를 흰 구름 위에서 활짝 펼쳤고 신선의 모습은 작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가로지른 피리만은 뚜렷이 묘사되어 있다.
1층에서 5층까지 모두 도자기 벽돌로 만든 벽화는 宜昌 도자기 공장에서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1층 홀에는 또 황학루와 관련된 문헌자료 및 각종 판본의 詩詞歌賦등이 진열되어 황학루 문화의 풍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서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오면 寶頂이 전시되어 있고 그 위에 종이 걸려 있는데 千禧鐘이라 한다고 한다.

千禧는 밀레니엄이라는 듯인데 2000년이 열렸을 때 귀원사(武漢市 漢陽에 있는 절)에서 종을 만들어 기증을 하고 2000명의 스님들이 모여 종을 치면서(아마 2000번을 쳤으리라) 밀레니엄 도래를 경축했다고 한다.
관광을 하면서 항상 절감하는 것이지만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느낀다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 위해서 출발 전에 모든 자료를 번역하여 자료를 만들어 갔지만 현지에서 설명을 들어야만 자료의 지식이 현실의 지식으로 바뀌고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호북성박물관의 曾侯乙墓 유물 □

황학루의 관광을 끝내고 우리는 호북성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은 東湖 가에 위치해 있었다.
박물관의 입구를 들어서자 홀의 전면에 曾侯乙墓의 전시를 알리는 구리로 만든 대형 작품인 “天뢰(천뢰)”가 설치되어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曾나라는 전국시대 姬姓의 諸侯國으로 대략 지금의 호북성 隨州市, 棗陽市, 京山縣 등에 위치하고 있었다.

1977년 9월 空軍부대가 隨州市 서북쪽에 있는 뢰鼓墩(뇌고돈) 부근에서 東團坡라 부르는 구릉지구에 레이더기지를 확장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시작한지 얼마 안돼 붉은 흙이 나오며 古墓로 추정되는 징후를 확인하였다.

책임자는 곧바로 상부에 보고를 하였고 1978년 여름 호북성박물관 등의 기관이 중심이 된 발굴팀에 의하여 희세의 진보인 대량의 문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器物中에는 많은 銘文이 쓰여 있었는데 ‘曾侯乙作持’, ‘曾侯乙之用戟’ 등 曾侯乙이 제작했거나 사용했다는 銘文이 208곳에나 표시되어 있어 이 무덤의 주인이 曾侯乙이라고 확정하였는데 曾은 나라의 이름이고 侯는 侯爵이라는 작위를 나타내고 乙은 무덤주인의 이름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박鐘(박종)에 초나라 惠王 熊章(在位 B.C 489~432)이 왕위에 오른지 56년 되던 해에 박鐘을 만들어 증후을에게 宗廟의 祭器로 쓰도록 보내준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초나라 혜왕 56년은 B.C 433년으로 이 연대가 이 무덤이 만들어 진 상한선이 된다.

입구의 로비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당시의 지도와 무덤의 木槨을 전시하고 있고 墓主인 증후을의 頭像을 복원시켜 놓았는데 42~45세 정도에 키는 162cm로 추정되는 남자 모습으로 복원시켜 놓았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필자약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저서 : ‘증보 중국의학사’ ‘난경연구집성’ ‘詳解의학한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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