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醫學遺蹟 探訪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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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醫學遺蹟 探訪記(7)
  • 승인 2004.03.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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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① 약왕 비동의 무덤 앞에 있는 비각과 대추나무 비. ② 비각안에 서 있는 비동의 대추나무 묘비. 勅封明靈昭惠顯佑王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③ 안국 약왕묘의 馬殿 안에 있는 白馬와 馬동

윤 창 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 안국 약왕묘 ◆

약왕묘의 특징
안국의 약왕묘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첫째 전국에 수많은 약왕묘가 있지만 황제가 봉해준 유일한 藥王이라는 것이요.

둘째 비동장군이 살아서는 장군이었고 죽어서는 약왕이 되어 武醫合一, 人神合一이 되어 사람들의 尊崇과 祭祀를 받고 있다는 것이요.

셋째 사당의 배치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수많은 사당이 있지만 이와 같은 좌향을 갖고 있는 사당은 극히 드문 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비동이 관장하는 남방주작7수 중의 첫 번째 별인 井宿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1990년대초 안국시에서 “東方藥城”을 건설할 때 이 藥城의 핵심 건축물인 약재교역시장을 坐東向西로 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하늘의 뜻이었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넷째, 사당의 문 앞에 세워져있는 鐵鑄旗杆(쇠로 만든 藥王旗를 메어다는 장대)이다. 두 개의 鐵旗杆은 높이가 24m에 이르고 하나의 무게는 15톤이나 나가는데 중간에 철로 만든 두 마리의 용이 주조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봉황이 있으며 중간에는 철로 만든 대련이 걸려 있는데 “鐵樹雙旗光射斗 神휴普蔭德參天”이라 쓰여있다. 조형미가 독특하고 기술이 정교하여 전국에서도 “一絶”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다섯째, 馬殿이 앞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일반 사당에는 護法神이 사당의 前殿에 배치돼 있지만, 약왕묘의 前殿은 두 필의 駿馬와 말고삐를 잡은 4명의 馬동이 조성되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말은 당시에 비동장군이 타던 戰馬로 그는 낮에는 白馬를 타고 밤에는 紅馬를 탔는데, 비동장군이 돌아가신 뒤 그와 함께 순장한 것이라고 한다.

비동은 “顯靈(영으로 나타남)”하여 사람들을 치병할 때 이 두 필의 말도 함께 나타나 그를 태우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신비한 이야기들은 우리들이 문을 들어갈 때 신비감을 갖게하고 더 나아가 친밀감을 가져다 준다.

여섯째는 무덤이 사당 안의 正殿앞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중국 내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대추나무 通碑
일곱째는 대추나무로 만든 碑가 용으로 장식한 틀 안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나무로 碑를 만드는 경우는 드물고 대추나무로 碑를 만드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碑는 금박을 입혀서 “勅封明靈昭惠顯佑王之墓”라는 11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通碑를 왜 대추나무로 만들었는가? 여기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천년된 대추나무가 있어 무성하게 자라 하늘을 가리고 해를 가렸으며, 열매가 빼곡이 열렸으며 나무아래에는 항상 위엄과 씩씩함이 넘치며 얼굴이 인자한 노인이 앉아서 휴식을 하곤 했다 한다.

어느 날 南關城의 문에 황제가 의사를 부르는 방이 붙어 있었다. 내용은 공주가 병으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어 국내의 명의를 불러 여러 번 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자 황제가 특별히 방을 붙여 의사를 초빙하는데 만약 공주를 치료한다면 후한 상(重賞)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방이 붙은 지 여러 날이 지난 후 한 노인이 붙여놓은 榜을 지나 곧장 皇宮으로 달려갔다. 公主를 보고 노인은 대추와 같은 모양의 환약 2알을 주고는 먹으면 곧 좋아질 것이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노인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약을 먹자 공주는 上吐下瀉가 그치지 않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온 皇宮이 난리가 나고 總管太監은 급히 명을 내려 약을 준 노인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비동의 顯靈
몇 명의 太監들이 皇宮의 侍衛兵을 거느리고 말을 채찍질하여 추격을 하였다. 얼핏 보니 노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祁州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고 급히 말을 달렸지만 노인과의 거리는 항상 一丈정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노인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천천히 걸어갔고 추격대가 祁州의 南關門밖에 이르자 노인은 한 사원 내로 들어가 크고 굵은 대추나무 아래로 걸어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멍하니 있는 사이에 또 한 무리의 皇宮侍衛들이 말을 달려와 이르기를 공주의 병이 이미 완전히 나았다고 하였다.

원래 공주는 大病이 아니었고 단지 食積에 의한 消化不良이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上吐下瀉하자 脾胃가 通暢하고 온몸이 편안해진 것이다.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추나무 주위를 아무리 찾아봐도 끝내 노인을 찾을 수가 없자 이 地方의 官民들에게 물어보게 되었고 비로소 이곳이 東漢의 대장군 비동의 무덤임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비동이 때때로 영으로 나타나서 부근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주를 치료한 노인이 비동의 顯靈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 사실을 듣고 비동을 왕으로 追封하였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어서 이 천년 묵은 대추나무로 碑를 만들어 그를 제사하고 기념하였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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