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각자의 섬에서 그래도 함께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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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각자의 섬에서 그래도 함께 행복하기를
  • 승인 2019.12.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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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린애

김린애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아 지갑 놓고 나왔다

학부 시절에 읽었던 연애소설에서 주인공 커플은 눈 때문에 작은 마을에서 교통이 끊긴다. 주인공은 웃음을 터트리며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고립됐다고 행복해한다. 남녀관계는 아니지만, 이 이야기 <아, 지갑 놓고 나왔다>의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는 세계를 살아간다. 사실 단둘만 있는 게 아닌데도 그들은 세상에 단둘뿐이라고 믿는다.

미역의효능 지음, 새잎 출판

“나는 열아홉 살이다. 나는 정신병이 있고 임신했고 가출했다.”

어릴 때 친척 오빠들한테서 성폭행을 당한 노선희는 그에 이어진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살게 된다. 선희의 이름에서 선, 엄마의 이름 경자에서 경을 따와서 이름 지은 선경식당에서 단둘이 살면서 점차 정신병 증상을 보인다. 사람의 얼굴이 새의 얼굴로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게 되고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것은 자신의 얼굴뿐이다. 또 스스로는 “난 발랑 까진 애라서”라며 이성들을 차례로 전전한다. 소아 성범죄로 인해 성적인 관념이 잘못 형성된 피해자가 보일 법한 모습이지만 엄마 경자는 이해할 수 없었고 하루에 3시간을 때리거나 기도를 시킨다. 이 모든 상황에서도 선희는 나사 빠진 듯 쾌활하고 물렁하게 자라 고등학교 3학년에 임신을 하게 되고 가출을 하게 된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 노루(성이 노, 이름이 루이다.)는 선희와 꼭 닮은, 사람의 얼굴을 가졌다. 이제 선희와 루가 단둘이 살게 된다.

“난 할 수 있어. 난 똑똑하니까. 엄마한테 남은 건 나밖에 없으니까 엄말 구할 거야!”

루는 미혼모 엄마인 선희와 단둘이 산다. 그리고 9살에 교통사고로 죽는다. 엄마 몫까지 야무진 초등학생 유령 루는 선희의 아이로 환생하고 싶어서 저승길로 떠나지만 이미 인연이 다해서 그럴 수는 없다. 저승에 사는 영험한 무당은 루에게 대신 세 가지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한다. ‘자신이 만약 죽지 않고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보고 싶다’고 빈 루는 살아있었다면 성장함에 따라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엄마 선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루를 자신에게 가둬두다시피 집착한다. 결국 루는 죽지 않았다면 엄마를 버리고 가출한다.

상처받은 루는 그냥 한동안 잠들어 꿈을 꾸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다. 무당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행복한 꿈을 꾸라며 루를 재우는데 루가 스스로 선택한 꿈은 시뮬레이션이다. 엄마 키우기 시뮬레이션. 엄마를 잘 유도해서 행복한 미래를 만들겠다는 시도를 꿈에서 스무 번도 넘게 반복하다가 모든 끝은 악몽이 되고 루의 영혼은 심하게 다친 채 깨어난다. 그리고 정작 현실의 선희가 좋은 사람을 만나 어리광쟁이 쌍둥이 동생을 낳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경자 이야기 “나는 죄인이다. 하지만 행복한 죄인이다.”

경자는 외동딸 선희를 지키기 위해 이혼하고 익숙지 않은 식당 일을 하며 열심히 살지만 선희는 점점 이해할 수가 없는 증상을 보이고 바깥으로 나돈다. 그 과정에서 사이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폐쇄적인 교회를 마음의 의지로 삼는다. 선경식당에서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있고 싶었는데 선희는 점점 발랑 까진 “여자”가 되더니 끝끝내 임신을 하곤 채 가출을 한다. 미혼모가 된 딸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부끄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 딸을 미혼모로 만든 손녀에 대한 미움과 미안함이 겹친 마음에 선경식당에 자신을 가두고 홀로 나이 들어간다.

서로의 거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관계는 오래도록 유지될 수 없다. 심지어 한쪽이 어린아이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얼마나 닮았든 얼마나 사랑하든 간에 서로 타인이다. 진정한 부모와 자식사이의 사랑은 헤어짐, 분리를 견디어 내야하며 분리된 후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두 쌍의 모녀는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분리를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 제대로 치유받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 선희는 루에게 엄마 역할을, 그것도 떠나지 않는 엄마 역할까지 떠맡기고야 만다. 영특하다고 해도 어린아이였던 루는 선희가 심어준 대로 자신은 엄마를 지킬 수 있고, 그걸 못하는 건 자신 탓이라 자책하며 노력한다. 결국 마지막에서 이들은 정말로 이별을 한다. “어린인데 어른으로 해서 미안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잘 있어.”라는 이야기를 나누면서(스포일러가 아니다. 프롤로그에 소개되는 내용이다).

이들이 단둘만 있는 세상에 갇힌 것은 어린 시절 당한 범죄, 가족 이기주의, 성범죄 피해자나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 “정상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소외 등의 결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는 노루와 선희, 경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필요한 만큼만 다루고 있다. 작가가 심리학을 전공한 영향인지 등장인물의 감정은 과장되어있지 않다. 그림은 무성의해 보일 정도로 단순하고 등장인물들도 평범한 좋은 사람, 평범한 나쁜 사람들이다. 소름 끼치는 부분이지만 사건들도 사람들의 반응도 다 있을 법 하게 구성되어있다. 담담하게 읽히면서도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든 어른과 아이 간의 관계 이야기로 읽든 간에 감정과 인식을 크게 찢어서 스트레칭시키는 작품이었다.

 

김린애 / 상쾌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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