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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근본적인 성격변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이태형 원장님의 시평 ‘한의학의 학문적 가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를 읽고 (하)
2019년 08월 22일 () 06:00:03 정창운 mjmedi@mjmedi.com

(상편에서 이어)

필자는 이전 글에서 한의학의 주요한 치료법인 침구와 한약의 작용은 많은 부분 현대과학을 통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연구만이 아니라 임상분야에 이를 적용하는 것 역시도 점점 보편화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침 치료의 본성이 말초와 중추에서의 여러 조절작용을 가지기 때문에, 임상적으로 단순히 통증뿐만이 아니라 우울증, 수면장애를 비롯해 과민성 방광이나 골반염 등에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한 주장이 되고 있다. 서구의 주류의학계가 침 치료를 널리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이 한의학의 전통 이론을 존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경과학과 면역학 등 다양한 현대과학분야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여러 사실들과 침구에 대한 현대적 연구의 결과들이 조응하고 있으며, 이를 침구를 운용하는 의료전문직(medical profession)들이 주된 이해방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약 역시도 만성 저등급 염증과 같은 병리적 인자의 중요성이 밝혀지는 한편, 한약의 분자수준에서의 약리기전이 규명되어가면서 더 이상 이상한 치료가 아니라 점차 합리적인 의학적 접근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이러한 변화에서 한(寒), 열(熱)과 같은 기미론상의 여러 용어들은 전통적 맥락을 벗어나 쿼크(quark)들에 붙여진 이름만큼이나 단순한 분류기호가 되어가고 있으며, 다수의 한약들은 그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욱 중시되며 이들이 세포에 대해서 어떤 변화를 나타내 결과적으로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하는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지가 더 명확해지고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다양한 임상연구들에서도 연구 대상 질환에 한약이 효과를 나타내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분자기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한지 오래다.

이제는 정말로, 전통적인 이론체계가 왜 현대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수행되는 다양한 연구들이 보여주는 생산성을 보여주지 못하는지 의문을 가질때도 되었다. 한의학이 전통을 재현(再現)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면, 더 나은 치료를 통해 환자의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치료하려는 것을 목료로 한다면, 이러한 정체상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만 한다.

과거 수십년간 진행되어온 여러 한의학 관련 논쟁을 통해 한의계는 한의학의 수많은 전통 이론들이 그 나름의 가치는 있고, 그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이 문제일 뿐, 이를 잘 파악하고 그러한 이론들을 잘 살려나가는 것이 한의학의 발전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항변이 사업적 경쟁자인 의사만이 아니라, 실제 ‘현대과학’을 하는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 일부 사회 주류를 비껴간 인문학자들의 미미한 저항속에서나 한의계의 항변이 먹혀들었다는 것은, 실은 한의계가 가진 한의학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미 기존의 이해방식을 벗어한 새로운 영역에서, 충분한 성과물이 발표되고 있는 시점에서 역사적으로 수백년간 그 결과가 같았던 논쟁을 또다시 재개하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한의학의 학문적 토대 자체를 논의하기에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새로운 한의학의 학문적 토대가 이미 공고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국내 교육제도에 잘 이식시킬지, 이를 어떻게 교과서와 교육과 임상현장에서 구체화할지, 한의사의 새로운 직무로서 정의할지,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대전환이 이뤄졌다고 할 시점은 언제로 잡을지를 논의하기에도 늦은 시점은 아닐까?

이제 필자는 전통적 이론들이 정말 아직도 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하는지, 심지어 그러한 이론들이 한의사의 임상 진료에 과연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사회적으로 전문직이란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방법을 높은 강도의 학습과정을 통해 습득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고도의 특정한 기능을 상대적으로 균질한 수준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분명히 한의과대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의사’들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한의사란 현대의학과 전통의학을 능수능란하게 이해하고 두 의학을 융합하여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과반에 가까운 한의사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통념이 성립할 수는 있는가? 에 대해서 필자는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의사라고 하는 한 직군의 정체성과 신념에 대해서 정면에서 도전하는 일이기에 당연히도 수많은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길이지만, 수없이 발표된 ‘과학적 한의학’의 결과물들은 전통 한의학의 논리를 따른 학술적인 진보가 없다시피한 것과는 달리, 정말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에서 필자의 주장은 비록 고향에서는 환영받지는 못할지라도 세계적으로는 상식에 가까운 입장에 되고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이제 정말로, 필자가 수년 전 이야기 했던 것과 같은 ‘한의학에 음양오행이 필요한가?’라는 논의는 그 논의의 힘 조차 사라질 정도가 된 것이다.

한의학의 치료기술은 매우 효과적이며, 이는 현대적 연구를 통해서도 매우 잘 입증되고 있다. 한의학의 이 여러 기술들은 인류의 건강증진과 질병퇴치에 사용되어왔고, 더 많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생각은 교류하지 않으면 확산되지 못하며, 전통적 지식과 개념은 이러한 교류를 방해하는 수준을 넘어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현대과학의 맥락 안에서만 한의학적 치료들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에 대해 이제 한의사들은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한의학에는 현대의학과 구분되는, 고유의 내재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상상하기 보다는, 현대과학이 자명하다고 받아들이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왜 그것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되고 있는지, 더 나아지게 할 수는 없는지 하는 고민하는 학문이 한의학이 되어야 한다.

한의과대학도 이제는 한의학에 대해 비판적 시각에서 도전적 의문을 가지고, 왜 이것이 이런것인지 묻는 한의대생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한의과대학의 자퇴는 잘못된 인재들이 한의과대학에 들어와서가 아닌, 좋은 재원들을 한의계의 기존 체제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신호로서 해석해야 한다.

한의학의 내재적 원리가 의미가 있는가? 그러한 예외에 대한 소박한 믿음과 달리, 다수의 연구결과들이 말해주듯, 한의학의 전통 없이도 한의학의 치료기술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하면, 한의사의 정체성과 한의학의 형태는 그러한 외적 현실과 조응하도록 변모해야하지 않을까? 한의사 외에 다른 누구도 스스로 한의학과 한의학적 치료의 지위를 바꿔줄 수는 없다. 한약이 효과가 있다면, 그럴만한 과학적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일본 연구자들, 한의학을 이해하려면 분자생물학을 널리 알아야 한다는 중국 연구자들의 말은 한의학을 비난하거나 폄훼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말은 한의학이 그만한 가치를 가진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제 한국 한의계도 늦게나마 화답할 때다.

 

정창운(청연중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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