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 오래된 나와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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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 오래된 나와의 이별
  • 김영호
  • 승인 2019.08.17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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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이사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덕에 자연히 롯데 자이언츠(이하 롯데) 야구단의 팬이 됐다. 솔직히 열렬한 팬은 아니고, 그저 롯데가 이겼을 때 하이라이트를 보는 정도다. ‘야구를 보면서 굳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깊이 몰입하지 않게 됐다. 롯데 팬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선택지 중의 하나다.

글을 쓰는 현재 롯데는 최하위(10위)다. 올해 남은 기간 동안, 10위를 강력하게 유지할 듯하다. 그런데 현재의 롯데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말로 롯데는 가장 자유로운 시기라는 것! 과거의 영광을 잃었을 때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듯, 지금부터 롯데는 어떠한 도전과 실패도 용납이 되는 시기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통해 폐허가 되었을 때, 명예와 부를 잃고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을 때,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자연재해로 일상이 무너져버렸을 때야 말로 가장 비약적인 발전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시작과 끝은 하나고, 파괴와 창조는 하나다. 꼴찌라는 위기 속에는 1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숨어있다.

꼴찌가 아닌 5위나 6위는 내부 구성원의 관성적 영향력이 남아있다. 성적 향상을 위한 <혁신적 노력>보다는 <부분적 수정>이 내부 구성원의 지지를 받는 시기다. 감독을 교체하거나, 1군과 2군의 코치진을 바꾸거나, 한 두 명의 FA선수를 데려오는 정도의 변화로도 팬들의 분노는 기대로 바뀐다. 하지만 1992년 롯데의 우승 이후 이 정도의 노력으로 바뀐 것은 없었다.

내부에 오래 머물러왔던 구성원들은 변화 보다는 관행을 선호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다시 잘 할 수 있다고 새로운 리더를 설득한다. 새롭게 영입된 멤버들도 튀는 행보보다는 적응을 선택한다. 기존 분위기를 깨는 것은 감독일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원주민(구단 직원과 선수들)의 룰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원주민의 룰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관습을 무시할 수 있는 압도적 권위의 리더가 부임하거나, 과거의 영광이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추락한 경우다. 이럴 때, 오래된 목소리는 힘을 잃는다. ‘옛날처럼 하자’ ‘하던 대로 하자’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구단에 오래있던 직원이나 선수도 이 시기의 변화는 거부할 수 없다. 그들의 룰이 패배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이 끝없이 추락할 때 메이저리그 출신이라는 강력한 권위의 감독이 부임한 적이 있다. 히딩크 성공의 여운이 남아있던 2007년, 롯데의 첫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 그가 판단한 롯데라는 팀의 문제는 <두려움>이었다. 구단, 감독, 선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그가 새롭게 심은 비전 ‘No Fear’가 이루어낸 성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 가장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다가 어느 새 팀에 꼭 맞는 승리 공식이 만들어진다. 롯데는 10위인 지금이야 말로 우승에 가장 가까운 시기다. 하루하루의 승리에 연연하지 않고 팀에 새로운 비전을 이식해 가을야구를 할 수 있는 리더가 와야 한다. 그리고 리더의 승리 공식이 만들어질 때까지 모든 과거의 목소리는 숨을 죽여야 한다.

롯데자이언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어느 순간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온다. 주변 사람들은 다 잘되는 데 나만 안 되는 것 같은 느낌, 동료들에 비해 한참 뒤처진 것 같은 이런 느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순간과 만난다. 야구는 올해의 성적과 관계없이 다음 시즌에 새롭게 출발하지만, 인생은 리셋도 없다.

하지만 꼴찌를 경험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또 다른 기회와 만난다. 그럭저럭 살만한 때는 관심도 없던 제3의 기회가 눈에 들어온다. 이 시기야 말로 내면의 오래된 나와 이별할 수 있는 때다. 새로운 도전들을 반복하다보면 작은 성공을 이루게 된다. 꼴찌탈출에는 이 작은 성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리 큰 불도 작은 불꽃에서 시작하듯 큰 승리에 대한 확신도 결국 작은 승리에서 시작한다. 작은 실패의 반복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무능감(無能感)으로 이어지듯, 작은 승리가 반복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능감(全能感)으로 이어진다.

실패는 오래된 나와 이별할 수 있는 기회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야말로 가장 새로운 것이 설 수 있는 곳이다.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보다 아무것도 없는 공지(空地)에 짓는 것이 편하듯 롯데도 우리도 꼴찌가 낫다. 지금, 바닥인 것이 낫다.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한의대 입학을 위해 재수하던 98년 여름, 독서실 책상 앞 글귀가 생각났다.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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