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시련, 한의사 제도 전면부인 국민의료법안 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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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시련, 한의사 제도 전면부인 국민의료법안 발의
  • 승인 2019.05.10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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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안

이종안

mjmedi@mjmedi.com


배원식 선생을 회고하다(3)
◇사진1. 한의협회관에 세워진 5인 동지회 기념비.

1950년 2월 한의학과 한의사를 말살시키는 법안 내용으로 전국 한의사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던 ‘보건의료행정법안’은 조헌영 선생과 여러 선배 한의사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인해 폐기됨으로써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는 휴화산과 같은 상태였다. 한의학과 한의사를 말살시키려는 기도가 잠시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뿐 언제든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6.25 전쟁으로 피난 중이던 1951년 현실로 다가왔다. 1950년 6월 19일 개회된 제2대 국회는 개원 1주일이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되어 정부와 함께 부산으로 의정무대를 옮기게 되고 급변하는 전황으로 인해 의정활동이 곤란한 상태였다. 자연 이 때까지는 국민의료법안 심의도 관심의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열을 재정비하고 비록 전쟁 기간 중이기는 했지만 안정을 되찾으며 1951년 1월 15일 임시 국회의사당인 경남도청 회의실에서 제2대 국회가 개회됐다.

그리고 제헌국회 시절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던 국민의료법안도 다른 법률안들과 함께 다시 의정단상에 올랐다. 당시의 국회는 현재와 같은 분과위원회 중심제와 달리 본회의 중심제로 운영되었고 이런 이유로 동일한 사안을 대상으로 하는 서로 다른 법안이 몇 개라도 본회의에 회부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당시 한의사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국민의료법안도 사회보건위원회에서 제안한 법률안과 한국원 의원 외 80명의 의원이 제출한 법률안이 동시에 본회의에 회부됐다.

하지만 두 가지 법안은 제헌국회 시절의 ‘보건행정법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우선 사회보건위원회에서 제출한 법안의 경우, 제헌국회 때의 보건행정법안과 마찬가지로 한의사 제도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고 한국원 의원이 제안한 법안은 한의사의 자격을 의사와 차별해 격하시킨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두 가지 법안 모두 한의사 제도를 전면부인하는 셈이었다.

당시 양의 측은 사회보건위원회 안을 추진, 한의사 제도를 배제하고 양의사 제도만을 시행하는 단일법안을 제정하고 혹 여의치 않은 경우 한국원 의원이 제안한 법안을 추진한다는 양면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제2대 국회에 양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4명이 있었으며 보사부 장관 및 기관장 중에도 양의사 출신 관료가 여럿 있었던 반면 한의계는 국회의원은 물론 행정관서장 조차 전무했던 만큼 양의계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처럼 한의계의 염원이 철저히 외면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선배 한의사들은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위기 속에서 오히려 결집하고 문제를 타개해 나가는 방안마련을 위해 밤을 세워가며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문제 정국의 타개를 위한 방안으로 정치적 로비의 필요성에 모두가 공감했다.

지금도 가양동 대한한의사협회 회관 입구에 기념비로 남아 있는 5인동지회의 이우룡, 윤무상, 우길룡, 권의수, 정원희 선생 등을 주축으로 부산 지역에 거주하던 한의사들이 결성한 한국의약회의 활약이 이 때부터 빛을 발하게 된다.

이들 선생들은 양의사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국회 사회보건위원회에 한의사 제도의 입법을 위한 증언을 신청했다. 또한 서울에서 내려와 부산에 피난 중이던 김영훈, 방주혁, 박호풍, 박성수, 배원식 선생 등 한의계의 원로 및 신진 세력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들을 만나며 한의사 제도를 포함시킨 국민의료법안의 제정을 위한 로비활동을 전개하며 막후교섭을 벌였다.

당시 한의계의 신진기예로 원로 분들의 지시를 받아 국회의원들을 만나 막후교섭을 벌였던 배원식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이 때 로비활동에 사용되던 중요 무기는 바로 쌀이었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로비 활동의 중요 무기가 쌀이었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쟁 중인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 전 개봉한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북적이던 부산은 쌀은 물론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의 생계문제 해결은 어느 누구에게나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가족들은 물론 보좌관 또는 비서관까지 챙겨야 했던 국회의원들의 경우 딸린 식솔들의 생계문제 해결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쌀이야 말로 가장 고마운 선물이 될 수 있었다.

 ◇사진2. 부산임시국회.

서울·부산지역 한의계 원로들 각고의 노력, 마침내 결실 맺어

이처럼 서울에서 내려간 김영훈, 방주혁, 박호풍, 박성수 선생 등은 서울에 거주할 때부터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활용하고, 부산지역에서 선주 겸 한의사로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 놓은 이우룡, 윤무상, 우길룡, 권의수, 정원희 선생 등은 재정적 뒷받침을 하는 등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한의계는 마침내 국회 증언의 기회를 얻게 된다.

특히 당시 국회의장이던 신익희 선생과 만주 지역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교분을 맺고 함께 귀국했던 배원식 선생의 활약은 국회의원들과의 막후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보건사회위원회의 증언에는 윤무상, 권의수, 이우룡, 정원희 선생 등 4명이 나섰다. 윤무상 선생은 ‘한방이 양방보다 임상치료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권의수 선생은 단군성조 이래 ‘동의보감’을 거쳐 사상의학으로까지 발전한 한의학의 전통을, 이우룡 선생은 중국이 의료법령 제정 시 발생했던 한·양간의 격론을 상기시키며 한·양의가 서로의 장점을 흡수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정원희 선생은 한·양의가 공존하는 이원제 국민의료법이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할 것이며 한의학을 발전시켜 문화민족의 긍지와 주체성을 세계에 과시해야 한다고 했다. 마치 현재 대한한의사협회의 슬로건과 같은 주장이 이미 70여 년 전에 나왔던 셈이다.

결국 사회보건위원회는 위원회가 마련했던 법안을 수정, 한의사 제도를 포함시킨 법안을 채택했다. 선배 한의사들의 각고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된 셈이다.

현재의 한의사 제도를 확립한 국민의료법의 제정에 앞서 소개한 선배 한의사 분들의 노고가 컸음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들 외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우룡 선생이 학원장으로 재직하던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 학생들이다.

한의사 제도를 포함한 국민의료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기는 했지만 행정부와 입법부의 의사 출신 인사들을 대거 동원한 양의 측의 방해공작은 집요했다.

더욱이 주무 장관이라 할 수 있는 보사부장관은 아예 개회 초부터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다. 우리나라가 세계보건기구의 가맹국이므로 의료법에 한의사 제도를 두는 것은 국제적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양의계의 주장을 대변했다.

한의계에 불리한 발언만을 청취한 채 국회 본회의가 회의를 마치고 한의사 제도의 입법이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에서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 학생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힘을 가세했다.

이들은 두 번째 국민의료법안 심의가 있던 날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 200여명이 대거 입장, 학생회장 김영진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한의사 제도 입법에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은 국회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되어 한의사 제도 입법에 결정적인 일조를 하게 된다. 사회보건분과위원이던 김익기 의원이 이들 학생들의 존재를 예로 들어며 한의사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 분위기가 급속히 반전되며 한의계 측의 주장이 관철됐기 때문이다.(계속)

 

이종안 / 배원식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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