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시평]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와 한의학 재정의, 그리고 한의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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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형 시평]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와 한의학 재정의, 그리고 한의병명
  • 승인 2019.04.26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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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형

이태형

mjmedi@mjmedi.com


경희이태형한의원

현재 한의계는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 문제와 관련한 논의가 매우 뜨겁다. 대한한의사협회 43대 집행부는 지난 2월 8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는 국민의 진료 선택권과 편의성은 높이고, 경제적 부담은 크게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하고,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도 한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약속한 만큼 첩약 급여화 실현을 더 이상 늦출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4월 18일, 올해 10월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시행을 목표로 ‘한약급여화협의체’ 첫 회의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서울사무소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정부, 심평원, 공공기관 및 시민단체, 그리고 대한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한약사회 등이 참석하였다.

하지만 현 협회에서 이 같이 적극적으로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많은 한의사들은 현재 추진되고 있는 협회의 정책 방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점점 크게 내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글에서 필자는 우선 임상의이면서도 의사학 전공자로서의 시각에서 현 협회의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를 포함한 정책 일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현 시점, 한의계에 존재하는 가장 큰 문제는 한의학의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한의학’과 ‘현대한의학’이라는 용어가 종종 대비되어 활용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상황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현 협회는 ‘현대한의학’의 개념을 강조하는 정책을 꾸준히 추구해 왔다. ‘현대한의학’이라는 용어는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계승되어 온 ‘전통한의학’과는 달리, 현대과학 발전 흐름에 부합하는 한의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는 한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2018년 9월 3일 개최된 ‘제3차 대한한의사협회 자문위원회’에서는 한국한의과대학학장협의회에 의해 “한의학은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다”, “한의학은 생의학적 지식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한의학 교육은 근거중심의학에 기초한 교육을 기반으로 한다”와 같은 선언문이 제안되었으며, 지난 2019년 3월 24일 개최된 ‘한의학 용어 정의 재정립을 위한 공청회’에서는 협회에 의해 “‘한의학’은 생명에 대한 전인적 접근(holistic approach)을 바탕으로, 당대(contemporary) 최선의 과학기술 성과를 활용하여 질병과 상해를 진단, 치료, 예방하며 건강을 유지, 증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새로운 한의학 정의가 제안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 같은 정책 흐름은 큰 틀에서 2010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제6차 개정(KCD-6)에 한의병명이 통합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한의학 질병분류가 생의학에 기반한 질병분류체계 내에 통합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1972년, 1979년, 1994년에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와는 별도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한의)가 제정되었었지만 2010년부터는 모두 인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KCD의 U코드 안에 한의병명과 한의병증명이 흡수통합 되었다. 이는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근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동일하게 KCD 상병명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U코드 안에 있는 한의병명과 한의병증명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한의사들은 이 같은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문제는 2015년에 발생하였다. 당시 KCD-7으로 개정되는 과정 중, 기존의 KCD-6에 포함되었던 한의병명과 한의병증명이 대거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관련하여 2014년 발표된 ‘한의분류 통합개정과 국제전통의학분류 분석연구’를 살펴보면 “개념이 모호하며 사용빈도가 희소한 병명 코드는 유사코드로 통합”, “사용빈도가 희소한 병증코드는 상위개념으로 통합하고 세분화 코드로 제안”, “국제 전통의학 분류체계(ICTM)에 없는 코드는 우선적으로 단일화와 통합을 고려”한다는 개정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기존 KCD-6에 존재하였던 한의병명 97개와 한의병증 209개 가운데 다수가 한의상병명이 아닌 기타 KCD 상의 유사코드로 통합되거나 삭제되었으며, 본래 존재하였던 코드 가운데 한의병명 16개와 한의병증 127개만이 KCD-7에서 존속되었다. 한의병명의 경우 대략 83.5%, 한의병증의 경우 39.2%가 개정 과정 중 사라진 것이었다.

그 결과 이후 실지로 한의사들이 청구 시 U코드를 활용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대다수의 한의병명과 한의병증이 사라진 상황에서 적절한 한의상병명을 입력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동차보험 환자나 추나환자 진료 시에는 원칙적으로 한의상병명을 입력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다수의 한의사들은 번거롭게 U코드에서 한의상병명을 찾아 입력하기 보다는, 한의상병명 이외의 KCD 상병명을 입력하는 것을 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 협회에서는 한의상병명을 KCD와 일원화 한 것처럼, 한의학을 양방의학과 일원화 해나가는 방향을 정책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지에 게재된 최혁용 협회장의 2019년도 신년사를 보면 “대한한의사협회는 지난 한 해 동안 의료일원화, 의료통합이 우리의 미래이자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라고 당당하게 주장”해 왔으며, 앞으로도 관련하여 총력을 기울여 나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서 보다 본질적으로 ‘한의병명 개념’은, 그리고 ‘한의학의 학문적 정의’는 누구에 의해, 어떠한 방식으로 정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학문의 방향성을 좌우할 이 같이 중요한 결정이 충분한 학문적 임상적 고찰보다는, 상황적 필요성과 몇몇의 판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전통한의학과 현대한의학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한의사는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한의학을 이해하고 활용함과 동시에, 현대 의료의 한축으로서 한의학을 당대의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토대로 연구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래 ‘통합의학(Integrative Medicine)’이라는 개념은 ‘의료일원화’와는 다른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료일원화는 의학의 패러다임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통합의학이라는 개념은 환자를 중심에 두고, 그 환자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다양한 치료 방식을 조화롭게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한의사가 전통한의학과 현대한의학의 두 가지 한의학의 측면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의료인이라고 한다면, 통합의학에 적합한 의료인은 다른 어떤 직군보다도 한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의료일원화만이 우리 한의사들의 미래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의료가 국가가 주도하는 의료보험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표준화 작업을 바탕으로 근거가 충분히 뒷받침 되어야 한다. 여기서 근거는 무작위대조시험(RCT)으로 대표되는 임상연구를 말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RCT는 한의병명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현재 RCT를 토대로 개발되고 있는 30개의 표준임상진료지침(CPG)에도 화병(U22.2)을 제외하고는 한의상병명, 즉 U코드가 제외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통한의학’의 측면이 소실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한의학에서 바라 본 ‘병 개념’과 ‘병인 개념’을 토대로 한 의료 경험이 축적되어 형성된 첩약이라는 치료 기술을 무리해서 의료보험에 포함시키는 것이 현 상황에서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첩약은 표준화되기 어려운, 다시 말하면 한의학 자체의 학문적 특수성을 많이 담고 있는 한의학의 핵심적인 치료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000년대 이후 근거중심의학 개념의 확산과 더불어 생의학 상병명에 한약 치료를 적용한 연구 결과들도 이제는 꽤 축적되고는 있지만, 이는 한의학의 한 측면으로 보아야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한의사들이 치료의 기준으로 삼았던 병의 원인들, 예를 들어 정기신과 오장육부의 상태, 풍한서습조화와 같은 외감이나 음식상 로권상 방로상과 같은 내상의 범주들은 여전히 현대적인 연구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요통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추간판탈출증으로 해석하는 것과 신허요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치료의 목적과 방법에 매우 큰 차이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첩약 관련 연구는 물론 표준화, 객관화, 과학화와 같은 측면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한의학 자체의 병 개념 그리고 병의 원인 개념에서의 연구도 동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첩약 관련 연구나 정책을 진행할 때 단순히 ‘현대한의학적’ 측면만 강조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전통한의학적’ 측면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첩약을 건강보험에 넣어야만 한다면 첩약이 가진 특수성이 분명히 보장된 상태에서 정책 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대의 한의사들은 전통적인 한의학을 함과 동시에 현대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을 활용할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능력을 모두 지니고 있을 때 한의사가 지니는 의료인으로서의 가치는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현재 협회의 정책 방향은 한의학을 국가에 더 가깝게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우선 시 함으로 인하여 한의학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을 다수 포기하는 것 같아 우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부디 지금과 같이 앞으로의 한의학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시점에, 충분한 숙고를 토대로 한의학의 가치를 보다 높일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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