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訂方藥合編>의 판본 연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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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訂方藥合編>의 판본 연구-2
  • 승인 2019.03.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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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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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한의사 3인이 연구한 황도순-황도연 (32)

(지난 호에 이어)

 

Ⅲ. 고찰

1) <新訂方藥合編>의 처음 간행년도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新訂方藥合編>은 隆熙 2년(1908년), 大正 2년(1913년), 大正 7년(1918년) 등 모두 3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그런데 염태환7)은 “新訂方藥合編(一九0七年)李鍾楨·光東書局”이라 하여 崔承學을 李鍾楨으로 誤記했을 뿐만 아니라, 간행년도도 1907년이라 하여 가장 먼저 잘못된 기록을 摘示하였고, 이어 남산당편집국8)에서도 “西紀一九0七(隆熙元-丁未)年 新訂方藥合編 光東書局版”이라 하여 앞의 잘못을 답습하였다. 또한 김형태9)는 <方藥合編>의 年譜를 밝히면서 “西紀 1907年, (隆熙元-丁未年)-『新訂 方藥合編』 光東書局版”이라 하여 여전히 앞사람의 잘못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반복하였다. 이후 김남일10)도 “신정방약합편新訂方藥合編(최승학崔承學, 1907)”이라 하였고, 최근 이진철11)은 김형태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1907年(隆熙元年, 丁未) 『新訂方藥合編』 光東書局版”이라고 하여 마치 1907년 판본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록하여 판본에 대한 오류가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조사한 결과 판권지에 隆熙元年으로 되어 있는 책은 없었다. 사실은 隆熙元年 十二月上旬에 崔承學이 서문을 작성하고 첫 간행은 隆熙 2년(1908년)에 이루어진 것인데, 이와 같은 오류가 생긴 까닭은 崔承學의 서문은 있으나 판권지가 없는 판본만 보았기 때문이거나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서 제공한 서지정보에 “발행연도 隆熙 元(1907)”이라고 잘못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필자의 요청에 의해 현재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서는 “刊寫年 [隆熙 2(1908)]”라는 서지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2) 線裝本 <方藥合編>의 영향

<新訂方藥合編>에는 崔承學의 서문만 있고, 線裝本 <方藥合編>의 方藥合編源因이나 醫方活套原序는 없지만 큰 틀은 線裝本 <方藥合編>과 같다. 人參의 향약명 “삼”과 上統 17 當歸補血湯 活套, 藥性歌 大麥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新訂方藥合編>은 線裝本 <方藥合編>의 여러 판본 중 <證脈方藥合編> 里洞新刊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山草 三十三種, 中統 61 人參芎歸湯, 石隱補遺方의 黃連湯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重訂方藥合編> 美洞新刊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 편집자 崔承學

<新訂方藥合編> 서문에는 “隆熙元年 十二月上旬 大寧崔承學書于大同報社編輯室”이라고 되어 있어, 崔承學이 大同報社 編輯室에서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12)에 의하면 大同報는 1907년 3월 崔承學, 金光濟에 의해 창간되어 국민의 대동단결과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월간종합지이다. <大同報> 통권 제3호에는 國債報償義捐人氏名及金額總算이 수록된 점으로 보아 崔承學이 국채보상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현재까지 사료만 가지고는 崔承學이 구체적으로 의학 분야에서 어떤 활동을 한 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수많은 線裝本 <方藥合編> 중에서 <證脈方藥合編> 里洞新刊의 바르게 판각된 부분과 <重訂方藥合編> 美洞新刊의 바르게 판각된 부분을 채용하여 <新訂方藥合編>을 출판한 것은 편집자 崔承學이 단순한 출판업자가 아니라 학식이 깊고, 많은 線裝本 <方藥合編> 중에서 善本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4) <新訂方藥合編>에 추가된 내용

큰 틀에서는 <新訂方藥合編>이 線裝本 <方藥合編>을 따르고 있지만 독창적으로 새로 추가된 부분이 있는데, 師傳脈經, 脈法(張氏傷寒纘論), 種痘新法 등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脈法에서는 張氏傷寒纘論이 독특하며, 種痘新法은 <新訂方藥合編>의 원고를 작성하던 당시인 1907년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의학 부분인 馬病診察論, 馬部, 牛病部, 牛部 등이 <新訂方藥合編>에 삽입된 것은 당시 농축산업에 실용적인 도움이 되고자 하는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록으로 첨부한 西藥方은 崔承學의 계몽주의 내지 實事求是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최승학의 편집 정신은 <大同報> 통권 제3호에 실린 논설 제목 “捨舊從新이 學者之急務”에도 잘 나타나 있다.

人參의 藥性歌 중 主産後感冒의 “冒”, 石隱補遺方의 “石隱補遺方終”, 輪症霍亂自辛巳以後集驗方 중 霍亂의 霍과 震, 平胃散 蒼朮의 蒼과 瘡 등은 <新訂方藥合編> 3가지 판본에서 다르게 판각되어 있다. 이는 服藥食忌 當歸忌溫麪의 “麪”字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新訂方藥合編>을 간행할 때마다 새로 植字하면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1908년본 <新訂方藥合編>에서는 石隱補遺方 뒤쪽이 빈칸인데 비해 1913년본과 1918년본에는 石隱補遺方 바로 뒤쪽에 빈칸이 없이 곧바로 輪症霍亂自辛巳以後集驗方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연활자본은 판권지가 없으면 판본간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운데, <新訂方藥合編>의 경우는 판권지가 없다 하더라도 1908년본, 1913년본, 1918년본 중 어느 판본인지를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신연활자본 <新訂方藥合編> 연구를 통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이는 서적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차이점을 가진 다른 판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향후 다른 한의학 서적의 신연활자본에 대한 판본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Ⅳ. 결론

線裝本 <方藥合編>과 신연활자본 <新訂方藥合編>을 비교 연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신연활자본 <新訂方藥合編>은 隆熙 2년(1908년), 大正 2년(1913년), 大正 7년(1918년)의 3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2. 신연활자본 <新訂方藥合編>은 <證脈方藥合編> 里洞新刊과 <重訂方藥合編> 美洞新刊의 영향을 받았으며, 山草 三十三種을 제외하고는 線裝本 <方藥合編> 중에서 바르게 판각된 것만 선별 편집하여 책을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3. 신연활자본 <新訂方藥合編>에는 師傳脈經, 脈法(張氏傷寒纘論), 種痘新法, 馬病診察論, 馬部, 牛病部, 牛部, 西藥方 등이 새로 추가되었다.

4. 신연활자본 <新訂方藥合編>은 3가지 판본의 활자가 다른데 이것은 판각할 때마다 새로 植字한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7. 염태환, 增註國譯方藥合編, 행림서원, 1975:6.

8. 남산당편집국, 對譯證脈方藥合編, 남산당, 1977:5-2.

9. 김형태, 윤창렬, 方藥合編에 대한 연구,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1991:5:151-199.

10. 김남일,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유의열전, 도서출판 들녘, 2011:240.

11. 이진철, 의종손익을 통해 살펴본 황도연의 의학사상 연구, 2017,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2. 국사편찬위원회(http://thesaurus.history.go.kr/TermInfo.jsp?from=TermInfo&&term_id=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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