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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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 승인 2018.12.28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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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1] 신기회 강의

2001년 3월에 제천에서 동문모임을 했다. 금수산 기슭에 있는 리조트에서 모였는데 겨울 가뭄이 심해서 계곡은 바짝 말라 있었다. 고교와 대학교 동문인 일곱 명이 구성원인 이 모임은 만나면 주로 술이었는데, 4년 전에 이 모임을 통해서 8체질의학에 입문한 이후에는 세 명에게는 공동의 화제 거리가 생긴 셈이다. 일요일 아침에 메기매운탕을 먹고 헤어지는데, 대구 후배가 서울까지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신기회(新紀會) 모임이 있다는 거였다. 나는 당시에 가족들을 서울로 보내고 제천에서 혼자 지내고 있던 터라 그러자고 했다. 후배는 그날도 그 신기회 모임이 ‘권도원 선생의 강의’를 듣기 위해 특별히 모이는 거란 사실을 내게 숨겼다.

권도원 선생이 신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한 것은 2001년 3월 3일(土)과 3월 4일(日) 이틀이다. 그러니까 이 후배는 일요일 모임에만 참석을 한 것이다. 강의 내용에 대한 언질을 미리 들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권도원 선생은 첫날에는 체질침 1단방과 2단방에 관한 내용을, 둘째날은 14가지의 3단방 처방에 대한 내용을 강의했다.

내가 이 강의자료를 입수한 것은 2005년쯤인 것 같다. 요한한의원의 김창근 원장과 강남신광한의원의 최연국 원장이 함께 진행하던 요한한의원 강좌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때가 2005년 2월이었다. 마침 요한한의원이 있는 동네에 살고 있어서 초대에 쉽게 응할 수가 있었다.1) 그 강좌에 참가한 한의사들은 6기생이었다. 나의 자격은 초대 받은 참관인이었다. 수강생들은 모두 각자의 멘토가 있었다. 그러니까 멘토로부터 추천을 받은 사람만 그 강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멘토는 강의에 늘 동석해서 맥진과 자침 실습을 도와주었다.

8체질의학의 전수(傳受)를 위해 이런 학습방식은 아주 이상적이다. 그런데 단 하나 멘토들이 모두 선생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내가 그 강좌를 보고 느낀 점은 바로 인맥구축이라는 것이다. 신기회가 가진 결속력은 그런 방식을 통해 강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다.2) 물론 나는 국외자(局外者)였다.

요한한의원 강좌에 참석하면서, 정리된 맥진매뉴얼, 자침매뉴얼, 장부처방배열표를 얻었다. 그리고 2001년의 권도원 선생 강의를 통해서 정리된 3단방까지의 체질침 처방 자료도 있었던 것 같다. 또 권도원 선생의 저작을 모아서 복사해서 제본한 책자를 김창근 원장이 선물로 주었다. 『ECM』이라고 금색(金色)으로 제목을 박은 이 책자는 김창근 원장이 제작해서 권도원 선생에게 드리고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용재 원장3)이 동문 선배인 최연국 원장의 지시를 받아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2001년 3월 3일 제선한의원에서 신기회 강의를 시작하면서, 권도원 선생은 깊은 감회에 젖었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형식을 갖춘 강의는 1970년 전후(前後)에 경희대학교에 재직하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강의는 당시에 신기회를 주도하고 있던 조재의 씨가 권우준 씨를 통해서 권도원 선생에게 요청을 했다고 한다.

권도원 선생은 체질침의 2단방 체계까지는 논문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발표를 했다. 그리고 신기회 강의를 통해서 3단방을 설명했다. 논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처방의 구성 원리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3단방을 직접 설명했다는데 이 강의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또한 이 강의를 통해서 ZFP4) 처방이 처음 공개되었다.

 

[2] Onestep8.com

2001년 5월에 개설한 Onestep8.com5)은 8체질의학 전문사이트라고는 했지만, 게시판 몇 개를 결합하여 운영6)하는 소박한 형식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출범 후에 2002년 2월까지는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었다.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모집한 회원은 한의사나 한의과대학생으로 한정했다.

2001년 5월 15일부터 8월 13일까지 「step by step」이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을 통해 발송하는 매거진을 발행했다. 이것은 격주로 회원들의 이메일로 발송했는데 8호까지 발행하였다. 매거진의 내용은 당시까지 내가 수집한 자료들로 채웠다. 이것을 받아 본 회원들이 자신들이 가진 자료를 자발적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대구시 태전동에서 경희한의원을 하던 이재형 원장이 있다. 그는 chejil.net7)이라는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용이 알차고 운영도 활발하고 성실했다. 2001년 5월에 이재형 원장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스캔해서 한의사협회 통신망의 자료실에 올려주었다. 그 자료는 부산에서 입수했다는 체질침 자료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인터넷 접속환경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것은 파일크기가 큰 그림파일이라 몇 번을 실패한 후에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이것을 출력해서 텍스트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내가 「부산 체질침 자료」라고 부르는 자료가 만들어졌고8), 여기에 내가 당시에 입수했던 다른 자료를 섞어서 조금 더 다채롭게 업그레이드했다.

나중에 알게 된 다른 자료들을 검토해 보니, 이재형 원장이 보낸 자료의 기반 자료는 1997년 4월에 김영태 선배가 강남의림한방병원에서 진행했던 강의 자료였다. 김영태 선배 강의에서는 체질침 처방이 2단방까지만 나온다. 그런데 이 부산 자료에는 고단방도 많이 나온다. 부산은 지금도 다른 광역시에 비해서 8체질이 아주 활성화된 지역이다. 그만큼 8체질의 역사도 깊다. 그래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다양한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 2001년에 Onestep8.com을 통해서 경원대9) 한의대 학생이던 최선우 씨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임상을 하지도 않고 학년도 높지 않은 한의대 학생이었으나 8체질론에 대한 지식이 아주 탄탄했다. 그가 컴퓨터를 좀 다룰 줄 안다고 자원해서, 2002년 3월에 서버를 옮기고 로그인을 통해서만 접속할 수 있도록 Onestep8.com을 개편했다. 그리고 회원가입 자격을 한의사와 한의과대학생, 그리고 해외거주 한의사로 제한하였다.

홈페이지 관리자는 회원가입 승인과 홈페이지 운영의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데 최선우 씨가 2002년부터 계속 맡고 있다. 게시판을 운영하는 재기기 역할은 역대로 이강재, 김지권, 이지훈, 김대현이 담당했다. 2009년까지는 오프라인 모임도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했다.

 

[3] 「62 논문」

Onestep8.com을 시작한 후에 Jay Kim를 알게 되었다. 그가 사용하는 이메일 ID인 ‘benedikt63’으로부터 카톨릭 신자이며 동갑일 거라고 추리했는데, 그는 당시에 LA에 있는 Samra 한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회원 가입 신고글을 통해서 서로 같은 체질10)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미국에 가서 늦은 나이에 한의대 학생이 된 사연11)을 여기에 모두 옮길 수는 없겠지만, 그가 8체질론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가 나와 연결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Jay Kim이 2001년 6월 15일에, LA의 학교 앞 복사집에서 권도원 선생의 논문을 발견했다고 메일을 보냈다. “이 논문은 1965년 동경 국제침구대회 이전에 작성된 듯합니다. 미국에서 우연히 구하게 되었는데 그림 빼고 글자만 정리했습니다. 동의학당 갈무리 복사본에 있을 줄 알았는데 거기에도 없었고요.” 나는 그에게 바로 번역을 부탁했다. 그는 번역을 시작하면서 사본을 다시 복사해서 국제우편으로 내개 보냈다. 체질침 「1차 논문」12)의 레퍼런스에 들어 있으므로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권도원 선생의 숨겨진 이 논문을 본 적이 없었다. Jay Kim은 내가 「부산 체질침 자료」를 만든 것처럼 영문으로 된 이 논문을 타자로 쳐서 텍스트화 했다. 그리고 번역을 시작했다. 번역한 것을 내게 이멜로 보내면 내가 어색한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그에게 보냈다. 그런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번역을 마쳤다.

「1차 논문」과 「2차 논문」13)의 어디에도 체질침의 이론과 원리에 대한 설명이 없다. 체질침의 원리가 궁금했던 나는 늘 그것이 불만이었다. 「62 논문」14)을 보았더니 권도원 선생이 왜 그 이후의 논문을 그렇게 썼는지 이해가 되었다. 체질침의 이론과 원리는 「62 논문」에 모두 설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후의 논문에 중복해서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Jay Kim과 내가 판단하기에 신기회 사람들도 이 논문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15) 왜냐하면 그때까지 알려진 어떤 자료에서도 이 논문에 대한 언급과 내용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질침 전도사를 자처했던 배철환 선배도 이 논문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텍스트로 만들고 번역 작업을 마친 후에 이 자료를 공개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그래서 대구에 있는 후배를 통해서 서용원 선배16)를 연결하고 또 조재의 씨에게 연락이 닿았다. 그런데 내게 온 답신은 ‘공개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권도원 선생이 이 논문의 내용이 공개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1차 논문」은 체질침 기본방에 대한 논문이고, 「2차 논문」은 체질침 2단방을 발표한 논문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지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62 논문」을 본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프레임에 의해 「62 논문」의 가치와 참 의미를 알아보는 시각이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체질침은 탄생에서부터 장부방과 자율신경조절방을 별도로 가지고 있는 2단방 체계였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즉시 아주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고 말았다. 권도원 선생은 왜 「1차 논문」으로 퇴행했던 것일까?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남양주에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갔으니, 만약 집에서 먼 곳이었다면 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김창근 원장도 내가 같은 동네에 있어서 불러준 것 같긴 하다.

2) 강좌를 마치면 멘토나 선배의 한의원에서 진료현장을 참관하게 한다. 그리고 8체질 한의원으로 개원하면 그 한의원과 가까운 곳에 사는 환자를 보내준다. 그리고 대학원의 학위과정을 하면 같은 전공 교실로 인도하고, 논문을 쓸 때도 케이스를 모아 주면서 서로 돕는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3) 정용재는 수원 영통에 있는 신광한의원을 최연국에게서 물려받았다. 이후에는 청량리에 있는 세선(世宣)한의원을 이상길로부터 받았다. 수원의 신광한의원은 최선우가 이어 받았다.

4) 목양체질(Hep.)의 경우 ⅦoⅤoⅢ".이다.

5) http://onestep8.com

onestep8.com은 도메인이고, 처음에는 일보회(一步會)라고 불렀다.

6) 이야기방, 자료실, 공지사항, 방명록

7) www.chejil.net

8) 이 자료를 처음 만든 김영태 선배에게도 또, 다른 자료를 첨가하는 작업을 했던 사람에게도 텍스트 파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컴퓨터 속에 잠들어 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럴 것이다.

9) 가천대학교로 바뀌었다.

10) 같은 체질끼리는 말이 금방 통한다.

11) 그와 나는 82학번이다.

12) 「A Study of Constitution-Acupuncture」 1965. 10.

13) 「Studies on Constitution-Acupuncture Therapy」 1973. 9.

14) 「The Constitutional Acupuncture」 1962. 9. 7.

15)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신기회에 속했던 사람이 만든 자료집을 보았는데, 이 중에 「62 논문」을 번역한 것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또 번역도 했던 것이다.

16) 대구시 고신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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