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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정유옹의 도서비평]발 없는 조선의 침법 유럽에 가다!
도서비평┃역사 선생님도 가르쳐 주지 않는 조선왕조 건강실록
2018년 11월 09일 () 07:42:10 정유옹 mjmedi@mjmedi.com

때는 일제강점기 중반, 대구 근처 한적한 시골 마을 의원에서 침술을 배우며 허드렛일을 하던 재원은 일본 철강회사에 취직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한다. 그렇게 해서 기타큐슈의 철강회사에 도착한 재원과 일행은 금방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너 평 남짓한 방에서 십여 명이 생활하며 죽으로 연명하고 그것도 두 끼니만 배식이다. 하루 15시간을 일하면서 벌이는 조선보다 더 형편없다. 나중에 퇴사하면 한꺼번에 주는 형식이라 믿는 것은 일수 수첩뿐이다.

조선인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서 고된 노동을 하다 보니 동료들은 하나둘씩 병마에 쓰러진다.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돌아온 동료는 한 명도 없고 생사도 확인할 길이 없다. 믿을 것은 자신뿐, 스승의 침법을 필사한 손바닥만 한 의서 한 권으로 아플 때마다 공장에서 주운 철사 쪼가리를 침처럼 뾰족하게 갈아서 치료하기 시작한다. 주변의 동료들도 일본 병원에 가면 생체실험대상이 된다는 소문을 들을 터라 모두 재원의 치료를 받는데......

그러다 감독하는 일본인에게 발각되고 재원의 침통과 의서를 모두 빼앗긴다. 감독관은 의서를 자신이 자주 가는 침술원의 침구사에게 보여준다. 침구사는 이 의서를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보다가, 철강회사에서 노역하는 조선인이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침구사는 스승인 柳谷素靈(야나기야 소레이)에게 보여주고, 소레이는 감독관에게 돈을 주고 재원을 동경으로 데려온다. 재원은 당시 동양침구학원 교장이었던 소레이에게 환자를 치료하며 시술을 보여주게 된다. 1~2개의 혈로 환자들이 바로바로 효과를 보는 것을 목격한 소레이는 감탄을 한다. 이 침술이 바로 지금까지 일본에서 존재하지 않던 사암침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레이는 재원에게 자신 침구원의 잡일을 시키며 함께 환자를 보게 된다. 소레이는 재원에게 조선의 침법인 사암침법의 실마리를 완전히 익힌 후 자신의 치료법인 “경락치료”에 사암침법을 함께 쓰게 된다. 소레이는 이 ‘경락치료’로 동경뿐만 아니라 전 일본열도에 유명하게 되고, 그의 침술원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환자가 몰렸다. 해방 후 소레이는 재원에게 귀국할 차비와 노잣돈을 주며 배웅했고, 재원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재원이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조그맣게 한의원을 차린 재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다. 부산에서 사암오행침법 연구원을 차리고 제자를 양성한다.

한편 한국전쟁 동안 일본은 호황을 누린다. 한국전쟁 연합군의 전초 기지가 되어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들이 일본으로 모여들었고, 소레이의 유명세로 외국인들도 침구 치료를 받는다.

영국의 유명한 침구치료가인 워슬리(J. R. Worsley)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일본을 찾아서 소레이의 치료를 참관하게 된다. 그리고 워슬리는 소레이의 강의를 요청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소레이는 영국에서 사암침법을 자신의 만든 ‘경락치료’로 둔갑하여 유럽에서 침구학 전문가들에게 강의하게 된다.

해방 후 재원은 이 사실을 알고 분개하여 일본의 한방 잡지인 ‘󰡔医道の 日本󰡕’에 소레이가 사암침법을 표절한 것에 항의하는 내용의 기고문을 게재한다. 그러나 소레이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숨을 거두고, 재원도 분을 못 이겨 병이 나게 된다. 재원은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였던 김동필 서림 한의원 원장에게 “사암침법이 유일무이한 한국의 침법이라는 것을 꼭 전 세계에 알려 달라!”라고 유언하고 죽는다.

이것은 필자의 논문 「사암침법의 발전과 해외 전파 과정 연구」를 바탕으로 각색하여 소설의 형식으로 짧게 쓴 글이다. 이처럼 우리의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인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대학원생들이 이와 같은 조선왕조의 건강 관련 일화를 모아 『조선왕조 건강실록』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조선왕조 건강실록』에는 한의사의 전문가적 식견으로 승정원일기를 해석하여, ‘효종의 독살설, 소현세자의 독살설, 인현왕후 죽음 등’의 조선 역사에서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사건에 대하여 진상을 밝혔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서 일본 의학계를 흔든 김덕방, 조선의 외과전문의 백광현 등의 입지전적인 한의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읽다 보면 진료하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이 책의 인물과 사건이 하나하나 드라마로 제작되고 영화화된다면 환자 수가 줄어들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한의학의 인기는 정점을 찍었다. 다시 한 번 한의학계의 르네상스를 기대한다면 이 책에서 출발할 것이다.

 

정유옹 / 사암한방의료봉사단, 한국전통의학史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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