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藥合編 石隱補遺方의 石隱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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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藥合編 石隱補遺方의 石隱에 대한 연구
  • 승인 2018.09.0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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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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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重訂方藥合編>과 <證脈方藥合編>에는 책 말미에 石隱補遺方이 있다. 그런데 평소 필자는 石隱補遺方에서 “石隱”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石隱”이 醫人이라면 누구인지 궁금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의학계에서는 石隱補遺方의 “石隱”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필자는 방약합편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石隱의 존재에 대해 연구하던 중에 한영규의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1)는 <赴燕日記>를 연구하면서 “이재흡이 의원이면서도 동시에 비장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아, 무예청에 소속된 무관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이들이 <부연일기>의 작자 李在洽과 동일인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고 하여 <赴燕日記>의 저자 李在洽과 “石隱”의 상관성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살피지는 못하였다.

필자는 한영규의 단서를 바탕으로 燕行使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다가 일행에 醫官도 포함된 것을 발견하고 燕行한 醫官에 관한 기록도 다방면으로 찾아보았다. 그래서 <赴燕日記>에 나타난 石隱 李在洽의 진료기록과 <日省錄>, <承政院日記>의 기록을 토대로 石隱補遺方에서 “石隱”이 <赴燕日記>를 쓴 醫官 李在洽과 동일인물일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赴燕日記> 중 石隱 李在洽의 진료기록

그림 1. <赴燕日記> 중 石隱 李在洽의 진료기록

<赴燕日記>는 1권 1책 필사본으로 1828년(순조 28년) 李球(南延君,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醫官兼裨將이 燕京使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에 쓴 연행 기록이다. 한영규1)는 “청나라 문사 장제량의 시집이 현재 남아있고, 그 속에 이들의 호와 이름이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고 하면서 <赴燕日記>의 저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 시의 제목은 ‘조선에서 온 石隱 李在洽 主簿가 날 위해 자기 나라의 노래를 불렀다.’(朝鮮李石隱在洽主簿爲余作本國之歌)”라고 하여 <赴燕日記>의 저자가 石隱 李在洽이라 하였다.

한편 <赴燕日記>에는 李在洽이 淸에서 張生과 陳生을 만나러 ?旗廟에 갔을 때 감기에 걸려 앓고 있는 두 사람의 맥을 짚어 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해 준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聞其由則兩人俱是蔘熱懇診?余看?題淸凉解表之劑數三貼 <赴燕日記> 「往還日記」 7월 23일), 이를 통해 李在洽이 醫官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 <日省錄> 중 李在洽 관련기록

<日省錄>에는 李在洽에 대한 기사가 총 4회 나타난다. “武藝廳夏等試射放技藝施賞有差…李在洽”(1825년 3월 21일), “御春塘臺行瑞蔥臺試射…李在洽”(1825년 9월 17일), “施武藝廳夏等試射放技藝賞格…李在洽”(1827년 4월 22일), “施武藝廳冬等試射放技藝賞格…李在洽”(1827년 10월 5일). 여기에는 李在洽이 武藝廳의 관원으로는 나오지만 醫官과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3. <承政院日記> 중 李在洽 관련기록

<承政院日記>에는 李在洽에 대한 기사가 총 5회 나타난다. “兵批以李在洽爲楊花別將”(1856년), “兵批…李在洽爲同知”(1860년 6월 20일), “兵曹啓曰同知中樞府事朴修性李尙晉吳興昌李在洽”(1860년 6월 22일), “御營廳言啓曰謹依訓鍊院修改別單判下看役將校李在洽等四人”(1864년 4월 11일), “御營廳啓曰…謹此別單書入而新營看役敎鍊官資憲李在洽”(1864년 5월 19일). 여기에도 李在洽이 武官으로는 나오지만 醫官과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承政院日記> 1828년 2월 29일 기록에는 “南延君球爲進賀兼謝恩使李奎鉉爲副使趙基謙爲書狀官”이라 하여 <赴燕日記>의 “正使李球副使李奎鉉書狀官趙基謙” 기록과 일치한다.

 

Ⅲ. 고찰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2)을 통해 號가 石隱인 사람을 검색하면, 崔天範(?-?), 兪彦民(1709-1773), 柳基鎬(1823-1886), 孫永斗(1874-1947), 許湜(1879-1959) 등 4명이 있는데 이들이 醫者로서 활동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李在洽의 生沒에 관하여 한영규1)는 “의관 이재흡은 잡과(의과)방목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관이 어디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김윤희3)는 “부연일기의 작가 역시 이재흡(李在洽, 1799~1843)이었음이 확인되었다.”고 하여 그의 생몰년을 1799~1843년으로 밝히고 있으나 淸의 張際亮(1799-1842)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도 <醫科榜目>과 추가로 <議藥同參先生案>, <內醫院先生案>, <太醫院先生案> 등을 찾아보았으나 李在洽의 생몰년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선정4)은 “대개 의관은 內醫院과 惠民署에서 번갈아 가면서 1명을 임명해 사행 때 파견하였다. 특히 동지사나 별사의 경우 종친, 의빈, 대신이 중국으로 들어갈 때에는 御醫 1명을 따로 보내었다. 이번 사행의 정사는 종친인 南延君이었으므로 그를 수행했던 <부연일기>의 작자는 어의의 지위로 연행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으며, <新增東國輿地勝覽>5) 제2권 京都 下에는 權設職 부분 赴燕使臣에서 한번 행차할 때마다 “寫字官?員兩醫司醫員雲臺官一員”이라 하여 규정상 醫官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론에서 필자가 조사한 자료들과 당시 遞兒職 제도에 의하면, 무예청의 李在洽과 石隱補遺方에서 “石隱”이 동일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李在洽이 醫官으로서의 활동 내역이 <日省錄>이나 <承政院日記>, <朝鮮王朝實錄> 등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醫官이기는 하지만 입진을 하지 않았거나 입진 기록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난 기고(黃道淳의 改名 전 官職에 대한 연구①)에서 밝혔듯이 惠庵 黃道淳 또한 1849년 7월에 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1828년에 燕京使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醫官 李在洽과 교류가 있었거나 惠庵이 李在洽의 처방을 채록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惠庵의 <方藥合編>에 石隱補遺方이 추가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Ⅳ. 결론

1. <赴燕日記>의 저자이자 醫官兼裨將인 李在洽은 호가 石隱이다.

2. 方藥合編 石隱補遺方의 저자 石隱은 <赴燕日記>의 저자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3. 石隱補遺方은 <赴燕日記>의 저자 石隱 李在洽의 補遺方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1. 한영규, 19세기 한중 문인 교류의 새로운 양상 -『赴燕日記』ㆍ「서행록」을 중심으로, 人文科學, 2010:45:125-150.

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3. 김윤희, 부연일기와의 관련성을 통해 본 19세기 연행가사 무자서행록의 특징, 韓國詩歌硏究, 2013:35:181-220.

4. 이선정, 赴燕日記에 나타난 19세기초 中人 醫官의 淸 文物 認識, 歷史敎育論集, 2010:45:281-314.

5. 민족문화추진회, 新增東國輿地勝覽(영인본). 1969.

 

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 mc맥한의원, 우리경희한의원, 보광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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