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下晴都(Haruto Kinoshita)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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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下晴都(Haruto Kinoshita)의 기록
  • 승인 2018.08.25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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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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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林』誌1)를 발행하던 배원식 선생2)은 1964년 10월에 일본 도쿄에 있는 친지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간다.3) 도쿄올림픽4)이 열리던 때였다. 배원식 선생은 일본 방문 기간 중에, 국제침구학회5)의 조직위원장을 맡아서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木下晴都를 두 번 만나게 된다.

10월 29일의 첫 만남에서 하루토(木下) 조직위원장은 학회의 준비와 진행 상황을 설명해주었는데, 북한의 김봉한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김봉한이 참석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그리고 공식적인 초청장 발송은 이미 2개월 전에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배원식 선생은 그 말에 격분해서 대한한의학회에서도 대표단을 파견할 수 있도록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에, 하루토 조직위원장는 며칠 후 이사회6)에 가서 한국의 침구학자들을 초청할 것을 결정하여 와서, 11월 6일에 하루토 씨의 집에서 두 번째 만났을 때, ‘한국침구학회 측에서 명년(明年) 대회에 참석할 준비를 갖추어 달라고 하며 연사와 수행인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배원식 선생은 귀국하여 동양의대7) 그리고 대한한의학회와 상의하겠다고 답변하였다.

귀국 후에 배원식 선생은 『醫林』을 통해서 국제침구학회 참가 신청 공고를 낸다.8) 하지만 당시에 배원식 선생의 머릿속에는 이미 ‘권도원의 체질침’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9) 배원식 선생은 한의사 생활 동안 침술치료를 시행하지 않았던 한의사였다. 그래서 오히려 뛰어난 침술을 지닌 동료들을 존중했다.10)

권도원 선생은 1962년 10월에 타이베이11)에 가려다가 여권 수속 문제가 얽혀서 출국하지 못했다. 그리고 1965년에 비엔나12)에 가려던 계획도 국내의 외환사정 때문에 불발되었다.13) 국제학술대회 참석을 위한 이런 일련의 과정은 『醫林』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므로 배원식 선생은 권도원 선생이 두 번의 좌절을 겪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배원식 선생에게서 국제침구학회 소식을 알게 된 권도원 선생은 『醫林』을 통해서 국제침술학회 사무소로 초록과 논문을 순차적으로 보낸다.14) 그림 자료에 보이는 것처럼, 국제침술학회 사무소가 접수한 논문에 명기된 주소가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2가 6번지’이다. 이 주소는 배원식한의원의 주소이다. 『醫林』의 발행인이 배원식 선생이므로 이 주소는 의림사(醫林社)의 주소이기도 한 것이다.

논문을 보내고 권도원 선생은 출국 신청을 위해서 일본에서 온 초청장을 들고 외무부에 갔다. 그런데 당시의 외무부 담당자는 소속된 학회의 승인을 먼저 받아오라면서 돌려보냈다. 권도원 선생은 대한한의학회로 찾아간다. 그런데 이번엔 한의학회 회장이던 홍순용 선생15)이 제동을 건다. 논문의 내용에 대해 학회 차원의 공식적인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도원 선생은 대한한의학회와 서울특별시한의사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장소에서 한의사 회원들을 대상으로 공개 발표16)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65년 6월 8일에는 하계임상강좌로 ‘체질침의 실기’를 실연하였다. 또 경기도한의사회의 요청을 받아서 수원(6/16)과 인천(6/18)에서 ‘체질침의 이론과 임상’이라는 주제로 순회강좌에 참가하였다.

국제적인 학술대회에 나가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고자 했던 한의계 인사들이 많았다.17) 그래서 대한한의학회로서도 이런 공식적인 절차를 통한 검증이 명분을 위해서도 필요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절차와 과정을 통해서 권도원 선생은 대망에 그리던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1965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일본침구사회 주최로 일본 도쿄의 동경문화회관에서 열린 국제침구학회에, 대한한의사협회는 배원식, 진태준, 권도원을 대표단으로 파견했다. 권도원 선생은 10월 20일 오전 9시부터 진행된 ‘외국인 초대강좌’에서 두 번째 순서로 자신의 체질침 논문을 구두(口頭)로 발표하였다.18)

국제침구학회의 조직위원장이었던 하루토 씨는 경희대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1971년 5월에 한국에 온다.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강연을 한 후에 한의계를 탐방한다. 그러면서 1965년 국제침구학회 당시에 알게 되었던 권도원 선생의 진료실에도 방문하게 된다. 하루토 씨는 권도원 선생의 진료실에서 목격한 것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권도원 씨는 국제침구학회를 일본에서 개최하였을 때 訪日하여 스스로 考案한 體質醫學을 발표했던 분이다. 그 체질은 8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진단을 결정하는 주요한 조건은 脈診이고 難經계통의 맥진으로 분류하고 있다. 맥진방법은 난경계통의 尺部에 示指를 대고 中指 및 環指는 그보다 주관절 쪽으로 대고서 손가락을 강하게 압박하여 마지막에 남는 맥박부위를 구한다. 그 左右의 조합에 따라 진단을 결정한다.

이번에 訪問하여 見學했던 환자는 肝硬變의 중년남자이고 진단은 少陽人[土象人]이라고 결정되었다. 치료는 오른쪽 太白, 太谿, 復溜, 太淵19)의 경혈에 迎 또는 隨로 單刺 5회를 반복했다. 이것은 病이 왼쪽에 있기 때문에 오른쪽만 取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환자는 重症이기 때문에 다시 商陽, 至陰, 三里, 委中, 大都, 解溪, 神門, 少海 등의 경혈에 여러 번의 단자가 반복되었다. 이 취혈은 五行法則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20)

나는 책에서 체질침 3단방의 성립 시기에 대하여 논구하면서, 송광수가 권도원 선생의 대원한의원에서 체질침 3단방이 시술되는 장면을 목격한 시기를 ‘1971년에서 1973년말 사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21) 그리고 체질침 3단방이 성립한 시기를 1973년 초반일 거라고 추정하였었다. 그렇게 추정한 근거는 체질침 3단방에서 3단에 위치하는 자율신경조절방이 체질침 3단방이라는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처방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3단에 위치하게 된 원리 탐구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토 씨가 기록하여 남겨 놓은 이 자료에서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체질침 3단방을 비롯한 고단방(高段方)은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방법과 내용으로 실험되면서 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추리는 너무 단순했다. 하루토 씨가 남겨 놓은 경혈들을 정리해보면 표와 같다.

이와 유사한 동시대의 자료가 몇 건 더 있다면 비교를 통해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나, 이 자료 하나만으로 권도원 선생이 당시에 처방을 운용하던 방식이나 운용 상황을 살피기는 무척 어렵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 흥미로운 것은 처방에서 대도(大都)와 해계(解溪)가 사용된 이 부분이다. 이것은 ; 1) ‘實則瀉其子’ 법은 아니다. 2) 해당 체질에서 최강장부인 췌(膵)와 위(胃)에 대한 공통적인 조치라는 뜻이며, 아래의 자율신경조절처방인 심사방(心瀉方)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와 아래 모두 송혈(送穴)은 사용되지 않았다. 3) 즉, 膵經(Ⅴ)과 胃經(Ⅵ)의 화혈(火穴)을 함께 (-)하므로써 보수(補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4) 위에 나온 신보방과 방광보방에 土(-)가 쓰인 것과도 연관이 있다.

 

※ 참고 문헌

1) 『醫林』 제44호, 제46호, 제47호, 제51호, 제52호

2) 『大韓漢醫學會報』 16호(1965. 7.), 21호(1965. 12.)

3) 『國際鍼灸學會誌』 ?道の日本社 1966. 6.

4) 木下晴都, 韓國의 鍼灸 『日本鍼灸治療學會誌』 21권 1호 1972. 1. 15.

5) [상지대학교 강연 녹취록] 상지대학교 중앙도서관 세미나실 1999. 6. 10.

6)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 『新東亞』 2000년 8월호

7) 김남일, 1973년 서울에서 世界鍼灸學術大會가 개최되기까지 『한의신문』 2008. 12. 29.

8) 이강재 『학습 8체질의학』 행림서원 2009. 11.

9) 이강재 『학습 8체질의학 Ⅱ』 행림서원 2013. 10.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1954년 11월에 창간한 한의약학술잡지로 월간(月刊)이다.

2) 裵元植(1914~2006) 경남 진해 출생. 1954년 11월 『醫林』 창간. 1976년 국제동양의학회(ISOM) 창립.

3) 1964년 10월 14일부터 11월 10일까지 체류하였다.

4) 1964년 하계올림픽은 1964년 10월 10일부터 10월 24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18회 하계올림픽이다.

5) 일본침구사회(日本鍼灸師會)가 주최하여 1965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도쿄 동경상야문화회관(東京上野文化會館)에서 열렸다.

6) 당시에 木下晴都는 일본침구치료학회 이사회의 이사장이었다.

7) 배원식 선생과 권도원 선생은 당시에 동양의대(東洋醫大)의 강사였다.

8) 『醫林』 제46호 p.69,70

9) 배원식 선생이 ‘근일(近日) 연구한 한국침구학계의 독특한 침구 논문’이 있다고 하루토 씨에게 설명했던 것이다.

10) 사암침술(舍巖鍼術)의 대가로 알려져 있던 이재원(李在元 1901~1967)과는 동향(同鄕)이어서 더 친했고 이재원이 상경하면 꼭 만나서 대작(對酌)하는 사이였다.

11) 중화민국침구학회(회장 吳惠平) 주최로 타이베이에 있는 중산당(中山堂)에서, 1962년 10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제12차 국제침술학회(亞洲地區大會)가 열렸다.

12)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965년 5월 8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제13차 국제침술학회

13) 비엔나 학술대회 참가와 관련한 외환사정 문제는 1965년 1월말쯤 알려졌던 것 같다. 그래서 권도원 선생은 비엔나에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국제침구학회 참가 쪽으로 기울었던 것 같다.

14) 200자 이내의 강연 초록은 1965년 3월 31일까지, 원고 전문은 5월 31일까지 제출토록 되어 있었다.

15) 1965년 4월 20일에 제3대 대한한의학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6) 1965년 5월 9일(日)에 대한한의학회와 서울특별시한의사회 공동개최한 제1회 종합학술강좌에서 「체질침의 이론과 실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17) 권연수, 국제학회서 초청 받을 때 우리의 태도 『醫林』 제44호 p.22~25

18) 권도원 선생은 일본으로 출국하면서 어떤 연유인지, 논문 발표 때 도표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한 슬라이드를 짐에서 빠뜨리고 가져가지 않았다. 그래서 영문(英文)으로 작성된 원고를 보고 읽는 것으로 발표를 마쳤다.

19) 太淵이라고 적은 것은 經渠에 시술한 것을 木下晴都가 착각한 것이다.

20) 번역 : 김지권

21) 이강재, 체질침 3단방의 성립에 관한 궁리 『학습 8체질의학 Ⅱ』 행림서원 2013. 10. p.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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