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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서주희의 도서비평] 감정조절의 핵심은 안전감
도서비평┃감정조절: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를 지켜내는 방법
2018년 06월 29일 () 07:14:47 서주희 mjmedi@mjmedi.com

삼십육계 줄행랑은 사실 중국의 병법으로 가장 유명한 손자병법보다 더 앞서 나왔다고 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삼십육계는 본래 ‘전쟁을 하는 데 쓰이는 36가지 계책’이라는 뜻이고, 제1계에서 제36계까지 있는데, 그 마지막인 제36계가 ‘주위상책(走爲上策, 도망가는 것을 상책으로 삼는다)’이라고 합니다.

   

권혜경 著

을유문화사 刊

그런데 우리는 도망가는 걸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고 하면서 조롱조로 주로 사용하곤 합니다. 은연중에 도망이라는 걸 비겁하거나 부끄러운 행동, 무능력함으로 여기는 것이죠.

그런데, 도망치는 게 정말 비겁한 일일까요? 손자병법보다 더 앞서 나온 병법에서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였는데.

감정에 압도되지 않고 또 감정을 마비시키지 않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감정 조절입니다. window of tolerance라는 게 바로 내가 어떤 경험을 하였을 때 거기에 수반되는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범위인데, 사람들마다 이 범위는 다르고, 문제는 이게 너무 좁거나 감정의 폭이 너무 클 때 일어나게 됩니다.

흔히, 너무 화가 날 때는 ‘뚜껑이 열린다’ 라고 하죠. 이때에는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감정적인 쓰나미가 몰아치는 듯 격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상태는 완전히 방어적인 전투 모드인 셈이죠. 흑백논리만이 작용하는 극단적인 상태이므로,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무감동, 무기력한 사람들이 간혹 볼 수 있는데 굉장히 감정이 저하되어 있는 것처럼, 내성영역 아래에 있는 듯 해보이지만, 실제 속으로는 과다 각성상태나 그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 상태인 경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조절을 잘 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 까요?

여기서 필자는 안전감을 느끼는 것이 필수적이라 말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죠.

특히 감정조절은 초기 유아기 때의 경험이 중요한데, 감정을 조절하는 변연계는 그것이 기능하기까지는 생후 9~18개월이 지나야 하므로, 그전까지 유아는 자신의 감정조절을 100% 부모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때 오롯이 유아의 감정이 부모의 그릇에 담겨 감응되고 다시 소화할 수 있는 감정으로 유아에게 되돌려지는, 그런 과정을 거쳐 서서히 성장되어가는 것이죠.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 중에 ‘괜찮아’라는 시가 있어요. 밤마다 늘 우는 아이를 들쳐 업고, 괜찮아. 괜찮아. 그랬더니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아이의 울음도 멈췄다는... 정말 괜찮아 졌다는.

우리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저편에 엄마의 등과 품에서 토닥여진 암묵적 기억이 몸에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안전하지 않을 때 우리 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최신 트라우마 치료에서 다루는 뇌과학적 이론은 삼중뇌 이론과 다중미주신경이론으로, 파충류의 뇌로 불리는 뇌간, 포유류의 뇌로 불리는 변연계, 그리고 인간의 뇌로 불리는 대뇌피질 이렇게 나눌수 있다고 보고, 위협적인 상황이 되면 down-top process로 대뇌피질의 기능이 작동이 멈춰버리게 되므로, top-down process가 될 수 있도록 전전두엽의 원활한 기능을 되돌리는 것을 필수로 하고 있습니다. M&L 심리치료의 트라우마 치료의 근간도 이와 동일한 이론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환경에서는 방어활동이 일어날 필요가 없지만, 위협이 감지되면 생존전략의 일환으로써 싸우거나 도망가기(fight or flight) 방어기제가 작동되고,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얼어붙는(freeze) 방어기제를 쓰게 됩니다. 핸들만 잡으면 정신 못 차리는 사람, 아이들에게 화를 너무 잘 내거나 때리는 사람들은 싸우기 방어기제가 작동한다고 보면 되겠죠. 또 시험전날까지 게임하는 학생,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잠수 타는 사람들은 도망가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얼어붙는 반응은 그야말로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꼼짝도 못하는 부동의 상태를 말하는데, 성폭력 피해자들, 아동학대 피해자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극단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떤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는 해리 상태인 것이죠. 왜 도망가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거 자체가 질문이 될 수 없는. 도망갈 수조차 없는 그런 극단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던 유일한 기제가 이 얼어붙는 반응인 것입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우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던 얼음땡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아, 이게 온전한 도망가기 연습이구나. 도망치는 게 결코 비겁한 일이 아니고, 위험상황 폭력상황은 모면하고 회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어떠한 상황에서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이들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합니다.

출렁이는 배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뭔가를 붙잡던지, 바다로 빠지던지, 이도저도 못하여 망연자실 출렁이는 데로 휩쓸려 가던지..

출렁임 없이 고요하고 안전한 바다이어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항해를 할 마음도 생기고, 그저 그 자리에서 그 순간을 즐기며 낚시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세기 역사동안 외세의 침입, 일제강점기, 6.25 전쟁, 군부독재 등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제대로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는커녕 그런 끊임없는 위협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늘 긴장감에 휩싸여 방어기제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 적 아픔의 대물림이 곧이곧대로 세대 간에 전달되어 여기까지 온 것일 것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날.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헬기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생존배낭 준비하기가 유행이 될 정도로 극한의 대치국면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social engagement를 통한 갈등의 해소와 안전감의 무드에 그저 안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

무엇보다도 이렇게 사회적으로 안전, 안심감이 기반이 된다면 그간의 국가적 트라우마를 넘어서, 더 큰 변용과 변화의 단계로 나아가리라는 희망을 품는 건 너무 먼 미래의 일일까요?

 

서주희 / 국립중앙의료원 한방신경정신과, M&L심리치료 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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