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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주변 환경과 설계
1. 한의학의 주변환경과 세계 : 프롤로그
2018년 04월 27일 () 06:58:18 지규용 mjmedi@mjmedi.com

4월 하고도 중순, 중춘(仲春)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내렸다. 트럼프발 국제정치역학의 불가예측성이 경제 외교 국지분쟁 등으로 확산되더니 문대통령발 북핵협상 변수를 만나 더욱 혼돈스러워지는 와중에 시기(時氣)가 심하게 불응하는 이 눈은 내게 카오틱한 천인상응의 한 예일 것 같단 생각을 하였다.

 

문명과 기술발전의 역설

한의학의 주변 환경 역시 급격한 변화와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 다보스포럼은 세계의 정재계 지도자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고급살롱 성격이라 그 주제를 보면 당면한 현안과 미래의 추세를 짐작할 수 있다. 2016년에는 “4차 산업혁명 숙달하기(mastering)”로서 처음 개념이 나왔고, 17년엔 4차 산업혁명의 본격화에 맞춰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이었는데, 올해에는 벌써 기술의 발전 속도와 독점현상이 거버넌스를 넘어서 국가, 산업, 기업, 개인의 모든 부문에서 양극화와 불평등이 현저하게 심화될 만큼 4차 산업혁명은 급변하고 있다. 마침내 지난 1월 다보스는 기술기업 독점문제와 이기주의 등 기술발전의 역설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유되는 미래(shared future)”를 주제로 ‘스스로 성취한 문명의 역습(逆襲)’이라 할 수 있는 이상기후와 자연재해를 포함한 전지구적 문제를 다루었다.

 

과학기술과 문물은 전변하는 시대의 산물이자 추동자

기술이 인간의 실생활에 유용한 도구를 만들거나 활용하는 요령(방법)이라면, 과학은 대상에 대한 경험적 사실을 기초로 이성에 의해 체계화된 지식이자 기술개발의 원리나 법칙으로서 기능한다. 문물이란 사전적으로 ‘문화의 산물’로 정의되는데 인간이 창조한 정신적 작업인 ‘文’과 물질적 성과인 ‘物’로 구성된다. 기술이 삶에 직접적인 物에 가깝다면 과학은 정신작업으로 文에 가깝다. 과학기술이 문물을 만드는 범례(範例)이고 문물이 문화의 산물이므로 이 삼자(三者)는 항상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반영한다. 아파트문화, SNS문화에서 보듯 한 사회의 문화를 바꿀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인은 집(物)을 관리하고 사람(物)끼리 연락하기 쉽게 만든 기술이다. 이제 “디지털문화”가 일반화되었고 디지털문화콘텐츠학과처럼 아파트와 디지털에 문화를 입히는 컨버전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처럼 모든 학문과 기술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늘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또한 당대(當代)의 문화를 형성한다. 한의학과 의료도구들 역시 당대의 기술수준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화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해야만 하며 이로써 새로운 한의학을 열 수도 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역사에서 바로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 진화적 적응이론의 냉정한 가르침이다.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적응 변화는 마치 본래 내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울수록 좋겠지만 이질적인 것을 들여와 처음부터 그럴 순 없고 최소한 몸에 잘 맞는 옷과 같이 간단하고 거슬림이 없으며 효율적이어야 한다. 한의학이 양의학과 만난 지 어언 120년이다. 해방 전의 공백기를 거쳐 50년대 이후 90년대까지의 양의학 모방기, 2000년대 한의치료기전 및 효능검증 연구 초기, 2010년대 이후 한양방협진과 임상진료표준 등으로 한의학의 연구사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공통점이 있다. 한의학과 양의학이라는 두 주체가 있지만 전자는 늘 후자에게 부수적이어서 모방하고, 입증하고, 맞추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약자가 국가적 지원을 받기 위해 권력의 작동기제에 순응해온 결과이다.

그러나 의학의 대상은 환자이고 국민이며 세계인이다. 설사 한의학이 힘들게 양의학의 구미에 맞추었다 해도 자신의 가치를 보전하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생명을 잃을 수 있다. 국가의 연구지원이 아무리 늘어난들, 양의계와 소비자에게 양방의 기준으로 효능을 입증한들, 한의학의 치료능력 자체를 키우고 원리를 현재에 맞게 재구성하지 못한다면 한의학은 오래지 않아 자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정부지원연구기획은 주도면밀하고 장기적이며 여러 복합적 요소를 고려한 것이어야 한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이다. 한의학이 입고 있던 옷인 진찰과 변증방법, 환자의 몸과 마음을 읽어내는 용어와 사고방식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으므로 대학교육과 임상 모두에서 현대의 몸과 마음에 걸맞게 변신, 동화시켜야 한다.

 

한의학의 기반이론과 언어의 재구성

이러한 변신의 문제는 곧 정체성과 본질 및 대학교육의 목표 등과 직결되며 많은 견해들이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명실상부한 주체로서의 한의학, 한의학이론 자체의 현대화, 임상 치료능력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한의학을 한의학이게 하는 핵심원리와 인체론은 무엇인가? 필자는 주저 없이 핵심원리로 천인상응론과 음양오행론, 핵심 인체론으로 정기신혈진액과 장상경락형체론을 든다. 물론 이 외에도 기본관념으로 정체관과 항동우주관, 논리방법으로 비류, 종용, 변증, 규탁기항, 기타 영위, 형기, 형신, 정사, 운기론 등을 들 수 있지만 이들은 전자의 하위단계 혹은 연역 가능한 이론이거나 통합, 보완, 확장적 성격을 갖는다. 천인상응론은 자연계와 인간의 생성 및 작동원리가 같거나 흡사하여 ‘열린 계’로서 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원리적 천명이고, 음양오행론은 ‘계’의 구체적인 작동방식에 대한 이론이며, 정기신혈진액은 인간의 육체에 충만하여 생명현상을 발현하는 본체들이고, 장상경락형체는 이들의 물질적, 기능적 통합 및 생성과 운행, 상호작용, 병변을 일으키는 생명현상 발현의 기관주체들이다.

따라서 한의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다 함은 이들의 구조, 실질과 작용방식을 지금의 언어인 혈액, 체액, 에너지, 근육, 신경, 림프, 질량, 부피, 압력 등으로 서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양의학의 대응과목들을 배우는 방식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실패하였다. 핵심원리는 물질과 그 변화, 우주적 시공간과 지구적 거시환경들의 작동규율과 상호작용 방식을 설명하는 원리들이므로 물리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을 폭넓게 수용하여 해명하여야만 가능하다. 이것은 동시에 양의학을 떠받치는 기초학문이기도 하므로 이들을 이용하여 어떻게 서술하는가가 한의학의 정체성과 본질 및 양의학과의 차이를 부각하는 관건이 될 것이며, 나아가 양의학과 동등한 위치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게 된다. 동시에 이러한 작업은 관찰과 측정을 위해 필요한 방법과 장치들을 고안하도록 도울 것이다.

 

의료계의 4차산업기술 환경과 능동적 참여의 조건

최근 양방 의료계는 빅데이터연구와 의료용 AI를 활용한 진료에 적극 나서고 있으며 관련 산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뿐만 아니라 세계시장도 크게 늘고 있다. 개인은 점차 하나의 모바일기기로 통합하여 모니터링, 업데이트되는 자신의 건강관리정보에 대한 의존성이 커지고 있으며, 기업은 여기서 모아지는 막대한 의료빅데이터를 가공하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 어쩌면 한의학도 이같은 평시의료 데이터 구축과 시장창출을 못한다면 조만간 제도적 소외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현대의 소비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그 준비를 위해서는 양의학 개별과목이 아니라 기초 자연과학이론 단계에서부터의 철저한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한가? 사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7, 80년대에 제3의학을 제창하며 김완희교수의 유기능(類機能)이론이 나온 적이 있었지만 여러 원인으로 계승되지 못했고, 90년대에는 의대실험실에서 직접 배우다 보니 실험기술과 전공논문 업적이 비약적으로 늘었음에도 한의학 중심의 거시적 통합은 오히려 어려워지게 되었다. 2016년 말 한 학회지에서 한의학과 시스템생물학특집을 발간한 적이 있고, 2008년에 이미 데니스 노블교수와의 대대적인 이벤트를 거친 것도 어쩌면 그런 노력의 연장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소중한 경험이고, 학계와 임상에서 각 분야별로 양의학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전문가들이 매우 많아졌기 때문에 하위 단계의 기초를 갖추어 통합할 수 있다면 예전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척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의 가치에 대한 확신과 미래의 비전

과거 데모를 하며 전 한의계가 파업을 하던 시절 ‘한의원이 진료를 안 한다고 무슨 영향이 있겠나?’ 내심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노블교수가 얘기하듯이 생명에 대한 환원주의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스템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통하여 생명의 오케스트라를 통찰하는데 한의학은 중요한 이념적 가이드역할을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양의학의 심각한 오류와 문제점들을 시정하는 현장해결사로서, 심신의 합일을 통하여 ‘문명의 역습’과 인간소외 등의 지구적 문제를 치유할 힐러로서의 가치를 가진 최전선의 응용학문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비전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의학을 논리적으로 명백하고 과학적으로 예측가능하며 임상적으로 재현될 수 있도록 지금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고, 나아가 4차산업시대의 클라우드와 P2P네트웍 기술환경에 맞는 데이터 생성, 구축방법을 개발하여 한의학자율주행시스템이 가동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교육의 내용도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하지만 주체인 교수와 학생부터 강한 확신과 비전을 가지고 힘을 합쳐야 한다. 아무리 이단적 의견을 가졌더라도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토의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중한 인적 자원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위해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한의학의 정체성과 지향점, 한의대 학부기초교육의 혁신방법, 병리학과 상한론 교과목을 예로 들어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이것이 정답이라 주장함이 결코 아니며 타 교과목 및 관심 있는 有志讀者들의 지속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허점 많고 서툰 발어사이다.

*추신: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 사용된 ‘과학’의 의미는 Kuhn의 패러다임에 연관된 ‘문제풀이 범례’의 개념과 가장 가깝고, 논증형식에 있어서는 실증주의자들의 과학에 관한 일반적 개념과 원칙을 가지고 사용한다. 다만 실증주의자들이 명시적이고 확실한 측정결과를 얻기 위해 실험조건을 임의로 통제하는 것이나 현상의 거시적 복합성에 무관심하고 지나치게 규범적(disciplinary)인 태도를 반대하며, 포퍼의 ‘반증가능성’ 개념도 일부 수용하지만 복잡계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열린 계’를 다루는 과학을 중시하며, 과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설명력과 재현성에 근거한 예측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의학도 언제나 과학방법에 따라왔다. 혹시라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 중 가장 좁은 의미에서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는 분들을 위한 사전 설명인 셈이다.

지규용 /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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