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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없이 길 잃기
2018년 03월 09일 () 10:14:56 김영호 mjmedi@mjmedi.com
   
김 영 호
부산광역시한의사회
홍보이사

얼마 전 MBC파업이 끝났다. 파업 기간 동안 PD들에겐 갑자기 많은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 동안 책을 쓴 김민식PD는 그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의도치 않게 생긴 잉여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는데 뜻밖의 성공이 다가왔다. 영어공부를 해서 책을 냈고 등산코스를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더니 기자들이 기사로 썼다. PD직업을 잃을지도 모르는 길의 끝에서 새로운 길을 만났다.

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을 봐도 본업이 작가인 사람보다 다른 일을 하다가 우연히 하게 된 일로 본업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룬 스토리가 많다. 그래서 본업을 포기하고 새로운 직업을 갖기도 하는 현상이 꽤 흔해졌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인생 최고의 한 끼를 만나고, 친구 대신 나간 소개팅으로 결혼한 셈이다.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흔하지 않은 스토리가 생긴다. 길을 잃었을 때야 말로 세상에 없는 나만의 경험들과 만난다. 당황스럽고, 낯설고 두렵기까지 한 바로 그 순간, 기회가 슥 내 곁에 다가온다. 이 순간을 잡아서 기록해야 한다. 이 순간이 내게 주는 의미를 붙들어야 한다. 그 의미 속에 내 인생의 성공이 있고 불행을 피하는 지혜가 있다.

평균대 위의 좁은 길은 아슬아슬 마치 우리의 삶 같다. ‘그 나이엔 그래야 돼. 그 나이면 그 정도는 갖추어야지.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돼.’ 와 같은 의무감의 좁은 길에서 이제는 내려와도 되는 시대가 됐다. 내려오면 뛸 수 있는데 그 위에서 조마조마하며 다 같이 걸어가고 있다. 내가 만들지도 않은 그 ‘의무의 평균대’위에서 내려오는 순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이야기가 생긴다.

길을 잃는 것은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과거처럼 끼니와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시절이 아니다.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걸어갈 용기만 있다면 충분하다.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에도 만남이 있고 기회가 있다. 계속 가던 길만 갔다면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그 만남과 기회에 주목해야 한다. 그곳에 새로운 행운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내 인생 속, 지금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다보면 별것 아닌 일이 큰 의미가 되어 나타난다.

내 의지로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타의에 의해 벗어나면 슬픔을 감당해야 한다. 길을 잃은 처음엔 혼란스럽다. 일터로 바쁘게 가는 사람들과 비교가 된다. 쉬지 않고 살아온 관성 때문에 놀고 있는 현실에 가끔은 죄책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곧 길을 벗어나 있음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불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 어떤 새로운 경험도 환영이다. 시간이 많으니 어떤 일도 할 수 있고 의무감 속에 살던 과거도 자꾸 돌아보게 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10년 뒤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길 희망하는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는 없는지, 일상에 파묻혀 있을 때 어떤 것이 가장 나를 지치게 했는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떤 보완책이 필요한지 많은 생각을 해보고 정리할 시간이 생긴다. 길 밖에서 느끼는 다행스러운 시간이다.

종합검진을 하듯 내 마음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수리가 필요한 곳은 고치고 약해진 곳은 강화한다. 길을 잃은 자의 특권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다.

길을 잃어야 돌아보게 된다. 실패를 해봐야 점검하게 된다. 사람은 넘어지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게 된다. 왜 넘어졌는지, 무엇에 걸렸는지. 우물쭈물 하다가 인생은 금방 흘러간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도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나이 들면 아프고 서럽다. 아프고 나이 들기 전에 부담 없이 길을 잃어봐야 한다. 영원히 내 길일 것 같던 그 곳에서 벗어나보면 내가 걷던 길이 다시 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럭저럭 인생을 ‘잘’ 살아왔다. 남들이 얘기하는 꽃길 위에서 ‘잘’ 살기 위해, 능동적 고민도 없이 선택된 길 위에서 살아왔다. 이제는 ‘잘’ 살아야 한다는 부담에서 조금 벗어나도 괜찮다. 길을 잃고 원치 않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순간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않는다면 선물 같은 의미를 찾게 마련이다. 요즘은 정해진 길을 계속 걷는 사람보다 내 의지로 길을 벗어난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너도나도 몰린 꽃길은 이제 꽃이 사라진지 오래다. 길을 잃은 후 만나는 모든 경험 속엔 <행운>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행운은 항상 변화 뒤에 오는 법이니까. 이번 글을 닫으려는데 소설가 김숨의 책 제목이 갑자기 떠오른다. [너는 너로 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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