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도쿄 국제침구학회(國際鍼灸學會)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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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도쿄 국제침구학회(國際鍼灸學會)의 위상
  • 승인 2018.03.0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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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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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원 선생은, 1965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침구학회에서 자신의 체질침(體質鍼) 논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유럽에서는 1950년대 초반에 독일침술학회, 프랑스침술학회, 오스트리아침술학회 등이 생겼고, 이런 조직들을 중심으로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침술학회가 성립되었다. 이 학회의 명칭은 프랑스어 표기에 따라 SIA라고 약칭한다. 국제침술학회는 1965년 5월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학술회의까지 총 열세 번의 국제침술학회를 개최하였다.


일본에서는 1950년을 전후하여 두 개의 침구관련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일본침구의학회(日本鍼灸醫學會/JSMA)와 일본침구치료학회(日本鍼灸治療學會/JAMS)이다. 1965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도쿄 동경상야문화회관(東京上野文化會館)에서 열린 국제침구학회(International Congress of Acupuncture & Moxibustion)를 개최한 것은 일본침구치료학회이다. 그리고 한참 후에 열린 1977년 제5회 세계침구학술대회(世界鍼灸學術大會)는 두 단체가 협력하여 개최하였다.

유럽에서 꾸준하게 국제적인 침술학술회의가 개최되는 동안 동아시아 3국에서는 이렇다 할 국제적인 학술회의가 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2년 10월 6일부터 8일까지 대만의 중산당(中山堂)에서 제12차 국제침구학회 아주지구대회(亞洲地區大會)가 열렸다. 이것은 중화민국침구학회 주최로 열린 것인데 동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린 국제학술회의이다. 학술회의 명칭에 ‘제12차 국제침구학회’라고 한 것을 보면 이 학술회의는 주최 측이 유럽의 SIA와 협의하여 ‘International Acupuncture Conference’의 개최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학회와 학술회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의 학자들은 구술(灸術/Moxibustion)에 관하여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 문제 때문이겠지만 동양의학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대륙과는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일본침구치료학회는 학회 발족 15년을 기념하여 국제학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제1회 국제침구학회(國際鍼灸學會)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최 측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침술학회(SIA)는 1965년 5월 비엔나 대회까지 13차례의 국제침술학회를 개최한 상태였다. 프랑스 측은 국제침술학회(International Acupuncture Conference)가 이미 유럽에 존재하고 있고, 지금까지 비엔나 회의까지 13회가 이어졌으며, 과거에 일본으로부터 이미 대표가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65년 10월의 일본 국제침구학회는 제14회 국제침구학회로 해야 한다고 하며 선취권을 주장하고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의 학회(International Society of Acupuncture)와 일본의 학회(Japan Society of Acupuncture & Moxibustion)가 정식으로 협의하여 진행한 국제학술회의는 도쿄대회가 처음이므로 일본 측으로서는 국제침구학회로서는 제1회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학회에 대표라 하여 개인적으로 참가한 것을 양쪽의 조직이 협의하였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견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대표는 아시아에서 거행된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국제침구학회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1962년 10월 대만에서 제1회라고 칭하는 것이 거행되었는데 만약 아시아국제침구학회라고 한다면 제2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의견도 일본 측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학술회의 명칭과 개최 회수의 지정 문제로 국제침술학회 본부가 있는 프랑스와 1회 개최라고 주장하는 일본 사이에 타협점을 찾지 못해서, 도쿄에서 차기 대회로 결정한 1969년 프랑스 대회를 서양(유럽)과 동양(일본)의 독자적인 기구들을 통합한 명실상부한 1차 대회로 하기로 정하고 그 명칭을 제1회 국제침구세계대회로 하기로 하였다.

『대한학의학회보(大韓漢醫學會報)』에서 권도원 선생의 학술회의 참가를 소개하면서 ‘제2회 국제침구학회’나 ‘제2회 아세아침구학회’라고 한 것은 위와 같은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도쿄에서는 유럽 측과 일본 주최 측이 서로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애매하게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1966년 6월에 나온『국제침구학회지』에 회지 호수와 국제침구학회의 개최 회수가 없는 이유는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일본침구치료학회지』로서는 통권 제35호이다.

애초에 일본 주최 측이 예상한 학술대회의 스타는 북한의 김봉한(金鳳漢)이었다. 당시 국제침술학계의 연구 동향은 주로 경락의 존재에 대한 탐구에 있었다. 그러므로 경락과 경혈의 실체를 발견했다는 김봉한의 논문은 국제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에 얽혀 결국 김봉한은 도쿄에 오지 않았다.

당시에 한국의 한의사협회로서는 국제학술회의에 공식적인 대표를 처음 파견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술대회 운영 협의체에서는 활동하지 못했다. 이후에 1973년 제3회 대회는 한국에서 유치하였다.

권도원 선생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 도쿄에서 발표한 발표문을 『대한한의학회보』 제20호에 실었는데, 자신이 참가했던 도쿄 국제침구학회(國際鍼灸學會)를 위와 같이 ‘International Congress of Acupuncture’라고 규정하였다. 학술회의 명칭에서 Moxibustion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이다. 도쿄학술회의를 유럽의 국제침술학회의 맥락으로서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논문에서 지칭하고자 할 때는 근거의 문제가 발생하므로, 위의 참고문헌 표기처럼 학회와 학회지의 명칭을 그대로 인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임상8체질연구회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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