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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윤희정의 도서비평] 절망과 반전
도서비평 | 낮은 데로 임하소서
2017년 08월 25일 () 08:52:13 윤희정 mjmedi@mjmedi.com

 

   
이청준 著
홍성사 干

여름 날 아침 태양은 화창한데, 나는 인생 최대의 고비에 서서 휘청거리고 있다. 평소 칠뜨기처럼 힝힝거리다가 근자에 세상 물정을 제대로 배우고 있다. 배움의 대가는 혹독하여, 밥맛을 잃고 잠도 잘 못자고 그런다. 우울과 좌절감속에 집에 틀어박혀있는데, 택배 아저씨가 이청준 소설을 놓고 간다. 주문한 책이 늦게 도착했나보다. 대환란의 시점에 책읽을 마음이고 뭐고 도무지 안내켜 표지만 물끄러미 몇시간이고 들여다 보다 자정이 되었다.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잠도 안오고 하여 책을 펴든게 그만, 안요한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가족에게 가난을 안겨준 무책임한 목사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요한은 기독교를 증오한다. 애초, 요한의 ‘특별한 탄생’은 아버지의 요한에 대한 ‘특별한 기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아버지를 향한 사무친 반발로, 교회를 멀리하며 요한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인생의 안락함과 출세를 보장받은 생의 절정에서 어느 날, 요한의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 이렇게 탄탄대로 화창했던 요한의 인생에 이유없이 고난은 찾아든다. 결국 두 눈의 실명, 청력의 상실로까지 망가진 요한을 버리고 아내마저 떠난다. 봄날같던 인생은 한 순간에 산산히 부숴진다. 

갑작스럽게 컴컴한 어둠에 통째로 내동댕이쳐진 그는, 절망의 나락에서 속수무책 자살을 시도한다. 의욕이 앞선 탓일까. 서두른 나머지 목을 매단 끈이 걸린 벽의 못이 덜렁 빠져버린다. 장님에겐 자살마저 쉽지않다. 불운하게도 그렇게 다시 살아남은 그는, 조급함이 빚어낸 자살 실패를 뼈저리게 반성하며 보다 치밀하고 철저하게 자살을 준비한다. 다시 결단의 시간. 죽음을 마주하고 그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감정을 떠올린다. 떠나간 식구에 대한 원망과 분노, 남겨둔  가족에 대한 죄스러움, 자식의 반항을 긴 세월 묵묵히 바라봐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 눈물로 용서하고, 용서를 빌고 자신과도 화해한다. 정화가 일어나고 그치지않는 눈물이 자살을 지연시킨다. 그리고 그 때, 요한의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내가 아직 너를 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너는 혼자라고 하느냐, 그만 일어나거라.’ 이로써, 안요한은 부활한다. 

어느새 내 처지는 까맣게 잊고, 안요한의 드라마에 몰입했다.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온 몸으로 증오하고, 거부했던 것이 완전히 절망한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해준 실제 사건을 읽으며, 소설(또는 삶)적 아이러니와 일상의 신비한 에피파니를 잠시 묵상해본다. 총체적 스토리를 한 실존 신앙인의 간증으로만 치부하기엔 여운이 크다. 기독교 소설이지만 요한의 인생드라마는 생철학 내지 실존주의적 물음을 던진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살아가며 한 번쯤 겪어봄직한 은총이라는 주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흥미로운 개인적인 신앙 진술을 넘어, 생의 신비적 본질과 그 운명적 주체를 생생하고도 압축적으로 목격하며 독자는 호흡을 늦춘다. 

따지고 보면 생은 원래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삶의 경이로움은 아이러니 속에 깃들어있다. 그래서 삶은 그 자체로 은총더미가 아니던가. 은총의 성격은 역설에 있다. 

‘절망은 언젠가 파괴자가 아니라, 가장 훌륭한 친구로 변할 날이 올 것이다. 절망은 삶을 구축하는데 현명한 친구가 되어준다.’ 극단의 절망에 처한 이에게는 오히려 키치적이고 감상주의적인 무용한 역설일 뿐이라고 냉소받을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릴케의 이 은밀한 고백은, 우리는 절망한 곳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삶의 자명한 이치를 되새기게 해준다. 우리는 삶의 밑바닥에서 마침내 박차고 솟아오를 강력한 힘을 또한 갖는다. 인간은 자신만의 생의 실타래를 푸는 열쇠를 이미 쥐고 있다(또는 쥘 수 있다.). 인간 자신이 우주적 총체성의 개연성을 항상 지니므로해서 흔히, 모든 것을 씻어냈을 때, 우주의 총체는 텅빈 우리에게로 들어온다. 극단이 극단을 맞이한다. 뜻하지않게 임하는 ‘신의 섭리’는 실상, 자기비움(정화)의 “의지적-비의지적” 결과다. 놓아야 얻을 수 있고 비워야 채워질 수 있다. 이 지당한 이치는 종교적 비의나 주술적 신앙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우리가 처한 일상의 실체다. 혼신의 자기정화(의지의 총발휘)는 극단의 순간 역설적이게도 비의지적 자기포기(self-renunciation:텅빔)로 반전되어 은총(총체적 우주의 개입)의 사건은 일어난다. 

요한은 삶의 바닥으로 떨어져서야 세상의 가장 어둡고 낮은 자리의 고통과 서러움을 볼 수 있었다. 종국엔, 자신을 낮은 곳으로 이끌기 위해 낮은 상황에 처하게 한 신의 ‘거룩한 섭리’를 자각하기에 이른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의 섭리는 외부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히 내 내부에서 비롯된다. 어찌됐건 밝고 따스한 곳에서는 결코 알지 못했을 이웃의 고통을 요한은 스스로의 절망과 극한의 시련을 계기로 볼 수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앎이 삶의 가장 큰 축복임을 이 소설은 강하게 간증한다. 이 축복을 얻기까지 삶은 그토록 긴 시간 모질고, 서럽고, 어두웠던 것이다. 결국, 요한은 스스로 그 축복을 얻어내는 은총을 이뤄냈다. 그리고, ‘소설 속 실제’ 은총을 목격하며 독자는 혈액과 정신을 탁하게 하는 도취보다, 가슴을 찢는 고통과 좌절을 기꺼이 껴안을 용기를 내볼 수도 있겠다 나직이 웅얼거리게 된다.

삶은 언제나 어렵다. 삶은 원래부터가 지적 담론과 학문적 이해 너머에 있다. 삶은 논리로 쥘 수 있는 저급한 영역을 초월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혼란스럽고 좌절한다. 이제 독자는 이청준의 ‘간증소설’로 인생의 반전은 자기비움의 필연적 결과임을 안다. 시련은 정화의 소중한 기회이다. 설령, 지금 가장 춥고 고통스럽더라도 실망할 필요없다. 반전의 씨앗이 절망 속에 이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내게 달렸다. 이청준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이것이다. 

윤희정 한의사 / 광주 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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