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의 여정을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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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여정을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며
  • 승인 2017.08.2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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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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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지훈 팀닥터의 2017 여자배구 그랑프리 결선 참관기 ②

 

3주차 대한민국 수원
한국에서의 시합은 함께 의무위원으로 있는 정형외과 교수님이 팀닥터를 맡아서 나는 선수들 부상에 대한 인수인계만 전하고 2주 간 몸담았던 대표팀에서 떠나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세 번의 시합 결과에 따라 결선 진출이 확정되는 터라, 한 주 동안 밀린 한의원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야구 중계 시간을 피하느라 시합이 금요일 4시, 토-일 2시로 일찍 열리다 보니, 또 다시 한의원을 맡기고 경기장을 찾아갈 여력이 되지 않아 중계를 보며 응원했다.

홈에서 팬들의 응원 덕택에 스타 선수들은 더욱 힘을 냈고 기회가 주어져 코트에 들어간 후보 선수들도 제 실력을 보였다. 카자흐스탄, 콜롬비아에 이어서 강적 폴란드도 홈에서 모두 3:0으로 이겨 세트실점 없이 완승을 거둬 한국이 8승 1패로 조 1위 결선에 진출했다. 한국에 유일한 패배를 안겨줬던 불가리아는 5위로 결선행이 좌절되고, 개최국인 체코와 독일, 폴란드와 함께 4개국이 결선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다시 체코 행 비행기를 몸을 실었다. 

◇미들 블로커 한수지, 아포짓 스파이커 황민경 선수와 함께.

4주차 체코 오스트라바
체코도 폴란드처럼 예전에 출장을 와 봤던 곳이라 말하자면 구면이다. 3년 전 남자대표팀 월드리그로 체코의 체스케 부데요비치라는 도시에서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래 봤자 보통은 경기장과 숙소 기준 반경 500m정도 까지만 익숙해지고 오는 터라 도시에 가봤다고 하기도 민망하다. 이전에 체코에 왔을 때 특이했던 거는 배구 경기가 아이스하키 링크장에 코트를 깔고 시합하더란 거다. 여자 그랑프리 결선이 열린 오스트라바의 경기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수들이 유니폼을 입고 테이핑을 하는 라커룸 역시 하키장 특유의 나무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울산과 같은 공업도시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공기도 좋았고 날씨도 적당히 선선하니 나쁘지 않았다.

그랑프리 결선의 특이한 점은 1그룹에서처럼 비디오판독이 세트 당 2회 요청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심이 인정되면 “챌린지”라고 불리는 비디오판독 요청이 계속 사용될 수 있고 역시 세트 당 2회 뿐인 타임아웃처럼 흐름을 끊는 역할도 대신 할 수 있다. 두 번째 맞붙는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처음 2세트를 내주고도 3세트를 내리 가져오는 대역전극으로 경기장은 물론이고 한국 매스컴에서도 난리가 났다. 아시아선수권 참가 중이었던 남자팀은 며칠 뒤 카자흐스탄 상대로 풀세트 역전패를 당하는 바람에 여자팀과 비교를 많이 당했다.

분위기 전환의 계기를 가져온 후보세터는 어쩌면 본인의 인생경기를 이날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브도 잘 들어가고, 실책도 없고, 볼도 때리기 좋게 네트에 가깝게 붙여 잘 올라갔다. 누구나에게든 살다보면 몇 번의 기회가 어느 정도는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 같다. 우선은 기회임을 알아봐야 할 테고 무대 위에 섰을 때 얼마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느냐는, 그동안 얼마나 절실히 성실하게 준비해 왔느냐의 결과물이 아닐까. 

경기를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다 보니 인생의 교훈을 많이 배웠다. 공격은 일단 리시브가 뒷받침 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 기본이 안 되고 욕심만 앞서 봤자 실력발휘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인생 아니던가. 서브에서 속칭 ‘미스’가 나면 사기가 꺾인다. 반면에 서브 득점은 체력소모 없이 팀 전체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살면서 큰 희생 없이 서브에이스 같은 상황이 많이 일어나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의 실수 덕택이 아닌, 난이도 높은 서브를 넣기 위한 실력을 얻으려면 삶에서는 어떤 연습이 얼마나 필요한 걸까.

아무리 좋은 공격수도 뒤를 부탁할 수 있는 수비수와 공을 때리기 좋게 올려줄 세터가 안 받쳐 주면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 시합도 삶처럼 내가 혼자 잘한다고 내가 오늘 컨디션이 좋다고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톱니바퀴처럼 모든 게 다 아귀가 잘 맞아 돌아가야 한다. 상대가 뭘 잘하는지 아는 것만큼이나 내가 안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이 전력분석인 것처럼 삶도 다르지 않았다.

준결승을 마치고 도핑 검사가 있었다. 스페인 의사 출신의 의무감독관(medical supervisor)의 지시로 두 명의 선수를 제비뽑기해서, 경기 직후 도핑검사실로 데려갔다. 체코인 여자 도핑검사관(DCO)이 소변 채취 시 따라 들어가는 샤프롱(도핑관리요원) 역할을 함께 해주고 있었다. 충분한 배뇨로 선수 두 명 모두 무탈하게 도핑 검사를 마쳤고, 기다리는 동안 의무감독관, 도핑검사관 들과 각자의 얘기를 나눴다.

한국을 와보진 않았지만 일본에서 시합 때 배뇨가 어려웠던 일본의 스타 선수가 경기장이 아닌 호텔로 가서 진행하자고 떼쓰는 통에 애먹었다는 감독관의 무용담을 들으며 국제 대회에서 영어의 중요성을 새삼 곱씹었다. 두 번이나 시합한 독일 팀 스텝과 유니폼을 교환하게 된 것도, 호텔 로비에 앉아 한참을 자국의 인기스포츠에 대한 대화를 나눴던 인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팀닥터라고 소개할 때면 한국의 한의사라고 반드시 얘기한다. 이게 다 스포츠 외교이자 한의학 홍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이 성적 좋은 팀이 아녔음 유니폼 교환도 응했을 리 만무했을 테니, 다 선수들이 잘 해준 덕택이긴 하다.

◇독일팀 스텝과 유니폼을 교환하다.

7월 30일 대망의 결승전. 벌써 두 번이나 싸워 승리한 폴란드를 상대로 세 번째 경기를 했다. 결과는 씁쓸하고 허망하게도 3:0 완패. 14명 엔트리를 못 채우고 12명으로 버텨 왔던 강행군으로 주전선수들의 체력고갈이 드러났고 여기에 전날의 독일전 풀세트 경기가 여기에 방점을 찍었다. 반면 같은 날 준결승에서 폴란드의 상대였던 체코는 홈팀 응원에도 불구 풀세트까지 가주질 못했다. 경기를 마치고 바로 시상식 세레모니가 열리는데, 3-4위 전에서 체코를 누르고 3위를 한 독일은 축제분위기인데, 우승을 눈앞에서 놓친 2위 한국 팀은 기뻐할 수 없었다.

두 번 이긴 상대를 세 번째도 이기리라는 법 없다는 겸손함을 배운 결승전이었다. 한 달 여의 강행군에 화룡점정을 찍을 마지막 시합에서 패했을 때, 경기결과에 그나마 덤덤할 수 있어야 할 의무인 나조차도 속상하다 못해 울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두 번을 겨루면서 상대는 이쪽의 공격패턴을 읽고 있었고, 심판은 속공수의 공격 득점 판정에 인색했고, 우리는 뭘 해보려 해도 톱니의 아귀가 안 맞는 그런 날이었다. 우리가 못해서라기보다 예선에서 두 번을 지고도, 결승에서 진검 승부한 폴란드가 잘한 거였다.

이렇게 동유럽 3개국에서 한 달 가까이 희노애락을 함께 한 대표팀 생활이 끝났다. 체코에서 돌아오는 길 우연찮게도 프라하공항에서, 유럽 전지훈련 찾아 온 아이스하키 성인남자 국가대표팀을 만났다. 7-8년 전 U18 대표팀 주치의 활동하며 만났던 선수들 몇이 성인대표팀이 되어 평창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가워하는 그들에게 여자배구 대표팀으로 체코까지 와서 준우승하고 돌아가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서로의 건승을 빌어주며 작별하면서 이런 우연한 만남이 다 초심을 돌아보라는 뜻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동고동락한 선수들이 구단과 대표팀에서 성장하고 지도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비록 한의사가 체육인이 아니지만 의무 선생님으로서 기쁨과 보람을 얻는 부분이며, 내 업장 희생해 가며 봉사하는 의미가 아닐까. 같은 마음으로 스포츠한의학의 지평을 넓혀 오셨을 선배님들께 감사하며 긴 소회의 글을 마무리한다.

 

박지훈
대한스포츠한의학회 의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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