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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서주희의 도서비평] 트라우마는 암호화되어 몸에 남는다
도서비평 | 몸은 기억한다
2017년 07월 07일 () 06:59:28 서주희 mjmedi@mjmedi.com

 

책을 검색하다 우연히 이 한국어 제목을 딱 만났을 때, ‘설마. 이거 그 책? 그게 번역되어 나온 거야?’ 하며 반가움과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베셀 반 데어 콜크 著
을유문화사 刊

베셀 반 데어 콜크는 트라우마 치료의 거장이자 산 역사라 할 수 있는 분으로, 이 책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개념 자체도 없을 시기에 베트남 참전 용사들을 직접 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치유를 위해 괴로워하고 고민하던 저자의 임상과 연구에 관한 것들이 잘 담겨져 있다. 그래서 한 장 한 장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건조하고 의학적인 지식이 담긴 내용이 아닌 트라우마 환자 한 분 한 분의 삶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으로, 그들에 대한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트라우마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습득하고 알았다는 지적 향유심에 벅차기보다 30년 이상 이 분야에 몸담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하고 치료해 온 저자의 삶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트라우마라 하면, 전쟁, 지진, 쓰나미, 산불, 지하철 참사, 9.11 등과 같은 대형 참사로 인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감수성과 내성영역은 다르기 때문에 이런 큰일을 겪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멀쩡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아주 일상적인 일들이나 발달 과정상, 혹은 방임으로 인해서도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아야 할 진실이다.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사건에 대해 질문이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오래전에 일어난 어떤 일을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 일을 겪는 동안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은 기억이 아니라 현시점에 나타나는 와해된 신체반응으로 경험한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으려면 트라우마와 다시 만나고 직면해야 하는 단계도 필요한데, 무엇보다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단계는 충분히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고 또 다시 정신적 외상을 입지 않는 상태가 된 후에야 가능하다. 이것이 간과되고 있는 임상 현장에서 그래서 치료 중에 재트라우마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전체 과정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일과 연관된 감각이나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고, 트라우마 사건 후에 나타나는 반응을 변화시키려면 정서적 뇌에 접근하여 ‘변연계 치료’를 실시해야한다고 한다. 즉 고장 난 알람을 수선하고 정서적 뇌가 다시 원래대로 조용히 배경에 머무르면서 신체의 기본 기능을 유지하는 일에 신경 쓰도록 하여 잘 먹고, 잘 자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아이들을 보호하고, 위험 요소로부터 방어하는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그의 해법으로 저자는 전통적인 의료기술(약물치료, 상담치료)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요가, 마음챙김 명상, 네트워크 관계망, 마사지, CST 등 환자에게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열린 마음을 받아들인다.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아픔, 너무나 깊은 슬픔, 너무나 높은 황홀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면, 마음은 질식해 버린다. 기억은 다시 평범한 상황이 올 때까지 하얀 백지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처럼 하나씩, 조심스럽게,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드러날 때까지 배열되는 과정을 통해 그 상태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만들어진다. --- p.365
 

“정신적 트라우마, 더 구체적으로 트라우마의 기억은 처음 유입된 시점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영향을 주는 이물질과 같다.” 어쩌다 찔린 작은 파편 하나가 감염을 일으키듯, 그 이물질에 노출된 신체가 보이는 반응은 유입된 이물질 그 자체보다 훨씬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 p.388


집착, 충동, 공황 발작, 자기 파괴적인 행동 등 정신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분류되는 행동들은 자기방어 전략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 그러한 증상을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장애로 여긴다면 치료의 목표가 적절한 투약 계획을 찾는 것으로 국한되고, 결국 환자는 평생 동안 약에 의존해야 한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신장 질환을 앓고 투석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 p.438
 
트라우마를 겪은 후 나타나는 반응들은 살아남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용기를 끌어 모아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와 마주할 수 있는데, 그러려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함께할 수 있을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감정을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고 정서적 뇌가 보내는 고통스러운 메시지에 귀 기울이도록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안전감과 관계 속에서 트라우마 치료는 시작되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암호화되어 몸에 남는다’라는 문장을 보고 있으려니, 최근 개봉한 모아나에 나오는 반신반인 영웅 마우이가 떠올랐다. 그의 거대한 몸의 표면엔 문신으로 그림이 잔뜩 새겨져 있는데, 어떤 일을 겪을 때마다 자동으로 그림이 몸에 새겨진다. 그 그림들이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바뀌기도 한다. 

영웅이었던 그가 인간세상의 멸망을 가져오게 한 괴물로 외롭게 살아가다가,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트라우마를 보다듬어주고 그 의미를 재해석해준 모아나로 인해 다시 본연의 능력을 되찾게 되어 모아나를 도와 용암괴물인 데카와 싸우게 된다.  

마지막 장면. 테피티의 심장을 되돌려 놓기 위해 분노로 울부짖는 거대한 용암괴물인 데카와 싸우던 절체절명의 시간. 그 찰나에 모아나는 데카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용암덩어리를 마구 던지며 울부짖는 그 괴물이 사실은 자신의 심장을 빼앗긴 테피티였다는 것을. 그걸 빼앗겼기 때문에 불을 내뿜는 괴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데카는 심장을 빼앗긴 트라우마로 인해 그렇게 분노로, 절규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아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데카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진짜 너는 누구인가. 너는 네가 누군지 알잖아.”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채, 괴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심장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의사가 되길 바라며.

서주희 / 국립중앙의료원 한방신경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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