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度淵과 관련된 족보의 오류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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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度淵과 관련된 족보의 오류에 대한 고찰
  • 승인 2017.07.0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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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춘·서정철·최순화

한기춘·서정철·최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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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한의사 3인이 연구한 황도순-황도연 ④

 

 

Ⅰ. 서론

 黃度淵(1808-1884)의 生沒年과 號에 대한 기록들이 책마다 다르게 되어 있어서 한의사나 의사학자에게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지난 민족의학신문 기고문들에서 지적한 바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黃度淵의 족보인 〈昌原黃氏世譜〉를 연대별로 살펴보면서 그의 卒年과 號에 대한 족보의 구체적인 오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그림 1. <昌原黃氏世譜>(丙午譜 1906년).

1. 〈昌原黃氏世譜〉(辛亥譜 1851년)
 필자가 조사한 결과 辛亥譜에는 黃道淳(黃度淵이 1873년경 改名하기 전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선친인 黃鍾鉉과 祖父, 曾祖父, 高祖父, 玄祖父 모두 나타나 있지 않다.

2. 〈昌原黃氏世譜〉(丙午譜 1906년)
 丙午譜에는 “字稚叔號惠庵 純廟戊辰三月二十八日生 蔭仕官止北部令 甲戌八月十七日卒享年七十七著附方便覽等書”라고 기록되어 있다(그림 1).
 여기에서 족보의 심각한 모순이 발견되었다. 戊辰生의 경우 “享年七十七”은 甲申(1884년)인데도 불구하고 〈昌原黃氏世譜〉 丙午譜에는 “甲戌八月十七日卒”(甲戌은 1874년)이라고 하여 무려 10년이

◇그림 2. 昌原黃氏世譜(戊戌譜 1958년).

나 차이가 난다. 즉 “享年七十七”과 “甲戌八月十七日卒” 둘 중의 하나는 오류인데 ‘方藥合編源因’에서 향년 77세로 작고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족보의 ‘甲戌卒’은 오류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족보에 “著附方便覽等書”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附方便覽〉에 나오는 號와 족보의 號는 惠庵으로 동일하다.

3. 〈昌原黃氏世譜〉(戊戌譜 1958년)
 戊戌譜에는 “字穉權號惠菴純廟戊辰三月二十八日生筮仕官止北部令高宗甲戌八月十七日卒著附方便覽等書”라고 기록되어 있다(그림 2). 戊戌譜에서는 丙午譜에 있던 “享年七十七”은 삭제되고 “甲戌八月十七日卒”만 실리게 되어 丙午譜의 오류를 정정하지 않은 채 출판되고 말았다.
 또한 족보에서의 號는 〈附方便覽〉에 나오는 “惠庵”이 아닌 “惠菴”으로 바뀌어 號에 대한 오류도 바로 여기에서 비로소 시작됨을 알 수 있다.

4. 〈昌原黃氏世譜〉(戊寅譜 1999년)
 戊寅譜에는 “字稚叔 號惠菴 一八O八年戊辰三月二十八日生 一八七四年甲戌八月十七日卒”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그림 3). 戊寅譜에서는 이전 족보의 오류를 정정하지 않고 한글을 추가하는 수준의 개정판을 발행함으로써 戊戌譜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또한, 戊寅譜에서의 號는 丙午譜에 나오는 “惠庵”이 아닌 戊戌譜의 “惠菴”을 써서 號에 대한 오류가 고쳐지지 않고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Ⅲ. 고찰

 〈昌原黃氏世譜〉(辛亥譜 1851년)에는 黃度淵, 黃道淳, 黃鍾鉉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어린 시절 惠庵의 어려운 가정형편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醫宗損益〉(1868년)의 跋文에서 惠庵은 “我本早孤 人生無强 近親家計又不贍 一炊到三旬 幸有老母 在僅僅托. 此身風霜飽已盡 奚論艱與辛所愧···圖新十五廢擧業 十六學黃神···”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生沒에 대한 연구에 있어 족보는 기본적으로 史料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한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이 일관되지 않거나 기록에 논리적인 오류가 있거나 다른 사료와 배치되는 경우 그 족보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황연규는 “惠菴 黃度淵선생님과 儒醫 愼村 黃泌秀선생님의 올바른 재조명(한의신문 2007.2.8.자 참조)”에서 “〈昌原黃氏世譜〉(戊寅譜)를 근거로 黃度淵은 甲戌(1874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號는 惠菴이 맞다”고 하였다. 또한 박훈평은 〈조선의인지〉 黃度淵에서 그의 卒年과 號를 각기 1874년과 惠菴이라 하였는데 본문에 “18世/恭僖公派”라고 하여 〈昌原黃氏世譜〉를 참조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昌原黃氏世譜〉의 黃度淵의 卒年에 대해 ‘甲戌’은 誤記이며 ‘甲申’이 정확한 것이다. 또한 黃度淵의 號에 대해 〈昌原黃氏世譜〉의 ‘惠菴’은 誤記이고 ‘惠庵’이 옳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연규와 박훈평이 卒年과 號에 대해 ‘甲戌(1874년)’과 ‘惠菴’으로 기술한 것은 丙午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족보에서 벼슬에 대한 기술도 판본마다 다름도 발견되었다. 黃道淳의 벼슬에 대하여 〈議藥同參先生案〉에서는 “北部令”으로 기록되어 있다. 〈昌原黃氏世譜〉 중 초기본인 丙午譜에는 “蔭仕官止北部令”이라고 되어 있는데 반하여, 戊戌譜에는 “筮仕官止北部令”으로 약간 달리 표현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蔭仕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얻어 하는 벼슬살이를 이르던 말’이고, 筮仕는 ‘처음으로 벼슬을 얻음’으로 다른 면이 있다. 한편 戊寅譜에는 “北部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예 누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족보에서 字에 대한 오류도 발견되었다. 필자는 이미 黃度淵이 改名 전 黃道淳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본보 2017.5.18.자 참조). 黃道淳에 대하여 〈議藥同參先生案〉에서는 “稚性·戊辰”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字는 稚性이고 戊辰(1808년) 출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丙午譜에는 “字稚叔”, 戊戌譜에는 “字穉權”, 戊寅譜에는 “字稚叔”이라 하여 오늘날 公文書에 해당하는 〈議藥同參先生案〉의 “稚性”과 배치되며 족보 내에서도 일관적으로 표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黃度淵의 부친인 黃鍾鉉의 生年에서도 족보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昌原黃氏世譜〉 丙午譜와 戊戌譜에는 “癸未生”으로 되었으나, 戊寅譜에는 “乙未生”으로 나와 있다.

 

한편, 황연규는 “황도연선생의 의문점들”이라는 블로그(http://m.blog.daum. net/12409/14997430 참조)”에서 “黃道淳에 관한 글을 《승정원일기》에 많이 볼 수 있는데 黃度淵과 동일인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모친은 1862년 10월 7일 작고하셨고 그의 부친은 훨씬 이전인 1821년에 작고 하셨다. 이를 볼 때 동일인으로 판별하기는 문제가 많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서 黃道淳의 還屬을 윤허한 시기인 1864년 10월 9일은 黃度淵의 母親喪(〈昌原黃氏世譜〉 丙午譜, 戊戌譜와 戊寅譜에는 황연규의 주장과는 달리 모두 “壬戌閏八月二十七卒”로 나옴)후 25개월이 넘은 시기로(그러나 황연규는 脫喪을 36개월이 넘어야 가능한 것으로 錯覺하여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喪禮상 충분히 還屬할 수 있는 시기였으므로 黃度淵은 改名 전 黃道淳과 같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Ⅳ. 결론

그림 4.

 이상에서 〈昌原黃氏世譜〉를 연대순으로 147년간 4개 세보(辛亥譜, 丙午譜, 戊戌譜, 戊寅譜)의 판본을 각각 비교 분석하여 黃度淵의 卒年과 號에 대한 기록의 오류에 대해 살펴본 결과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黃度淵의 卒年은 甲申(1884년)이 맞고, 〈昌原黃氏世譜〉의 甲戌(1874년)은 誤記다.
2. 黃度淵의 號는 〈昌原黃氏世譜〉(丙午譜 1906년)의 惠庵이 맞고, 이후 戊戌譜와 戊寅譜의 惠菴은 誤記다.
 앞으로 한국한의학사 연구에서 족보의 경우 여러 판본을 관련 史料와 함께 철저하게 비교하며 考證할 필요가 있다.

한기춘·서정철·최순화(mc맥한의원·우리경희한의원·보광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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