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庵 黃度淵의 生沒年度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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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庵 黃度淵의 生沒年度에 관한 연구
  • 승인 2017.06.17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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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춘·서정철·최순화

한기춘·서정철·최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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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한의사 3인이 연구한 황도순-황도연 ③

 

Ⅰ. 서론

 生沒에 대한 확정은 역사적 인물이나 저자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일이다. 더구나 조선말기 御醫(議藥同參)였으며 최고의 명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惠庵 黃度淵에 대한 生沒에 대한 연구 및 기록은 그간 여러 한의사나 의사학자간의 논란이 많았으므로 더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필자는 惠庵의 生沒年度에 있어 책마다 달리 표기되어 있는 점에 의구심이 들었으며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본 연구를 시작하였다.

Ⅱ. 본론

1. 1807년 출생설과 근거
 惠庵의 出生年度를 1807년과 1808년으로 본 출판물이 대략 절반 정도로 나타났다.
 惠庵의 1807년 출생설의 근원은 김두종의 저서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두종은 <韓國醫學史(全)>에서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純祖 7年(1807年)에 生하였다.”라고 하였다.

2. 1808년 출생설과 근거
1) <議藥同參先生案>
 필자는 黃度淵의 改名 전 이름이 黃道淳이었음을 밝힌 바 있는데(본보 2017.5.18.자 참조) 黃道淳에 대하여 <議藥同參先生案>에서는 戊辰生(180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2) 方藥合編源因
 <方藥合編 全載醫方活套>, <重訂方藥合編>, <證脈方藥合編>의 ‘方藥合編源因’에는 “···公年已七十有七不可以自抄···”라고 하여 惠庵이 甲申(1884년)에 77세라고 밝혔다. 또한 이 해 惠庵이 사망하였다고 적고 있으니 잉태기간을 감안하여 태어날 때 한 살이 되는 한국식 나이로 계산하면 惠庵의 出生年度는 1808년인 것이다.
3) <昌原黃氏世譜>
 황연규는 “惠菴 黃度淵선생님과 儒醫 愼村 黃泌秀선생님의 올바른 재조명(한의신문, 2007.2.8.자 참조)”에서 <昌原黃氏世譜>를 근거로 惠菴이 1808년에 출생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3. 1874년 사망설과 근거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오직 황연규와 박훈평만이 惠庵이 1874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황연규는 그 근거로 <昌原黃氏世譜>를 들고 있고, 박훈평은 <조선의인지> 黃度淵 항목에서 “18世/恭僖公派”라고 하여 <昌原黃氏世譜>를 참조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4. 1884년 사망설과 근거
 대부분의 조사된 서적에서 惠庵은 1884년에 사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方藥合編>의 ‘方藥合編源因’에서 惠庵의 死亡年度에 대해 아들이 甲申(1884년) 8월 17일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것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Ⅲ. 고찰

 이상에서 惠庵의 生沒 중 出生年度에 대하여는 1807년 또는 1808년에 대한 주장과 근거를, 死亡年度에 대하여는 1874년 또는 1884년에 대한 주장과 근거에 대해 살펴보았다.

 惠庵의 出年에 대해서는 <議藥同參先生案>에 근거하여 戊辰生(1808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몇 월 며칠에 출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족보 외의 자료는 찾지 못하였다.

 한편 김두종은 惠庵의 卒出에 대해서 <韓國醫學史(全)>에서 “惠庵은 77歲인 高宗 21年 8월 17일 甲申에 졸하고···”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김두종은 ‘方藥合編源因’에서 향년 77세로 甲申年에 작고하였다고 하였음을 알고 있었으나 한국식 나이계산법으로 出生年度를 逆으로 계산하면서 1808년을 1807년으로 착각하여 出生年度를 잘못 서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망에 대해서는 필자가 여러 판본의 <昌原黃氏世譜>를 확보하여 조사한 결과 <昌原黃氏世譜>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였기에 1874년 사망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지면관계로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다음 호에 하려고 한다). 따라서 惠庵의 사망은 ‘方藥合編源因’을 근거로 甲申年(1884년) 8월 17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김형태는 그의 논문 <方藥合編에 대한 연구>에서 “1884년에 卒하였다”고 하면서도 “향년 78세에 卒하였다”고 하였지만 ‘方藥合編源因’의 ‘향년 77세’와 배치된다.

 惠庵의 生沒年度에 대한 논란의 원인은 족보의 정확하지 않은 기록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惠庵이 黃道淳에서 黃度淵으로 改名한 사실과 ‘方藥合編源因’에서 “皆不留姓氏 但令施治者 捷於奇中”라고 한 바와 같이 저자의 이름(姓氏)을 밝히지 않으려고 한 惠庵의 뜻도 하나의 원인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많은 한의사나 의사학자가 수많은 저서에서 惠庵이 1807년에 출생한 것으로 잘못 적고 있다. 이러한 惠庵의 1807년 출생이라는 오류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의사학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김두종의 저서인 <韓國醫學史(全)>에 언급된 生沒의 誤記로 부터 시작되는데 아마도 그의 권위에 눌려 아무런 의심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의사학계의 발전을 위하여 이러한 무비판적 연구 관행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Ⅳ. 결론

 惠庵의 生沒에 대한 기록들이 책마다 다르게 되어 있어서 한의사나 의사학자에게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200여 년 전의 惠庵의 生沒年度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1. 惠庵(黃道淳)은 1808년에 출생하였으며 生月과 生日에 대한 족보 외의 자료는 찾지 못하였다.
2. 惠庵(黃度淵)은 1884년에 8월 17일에 사망하였다.
 향후 의사학 연구에서 철저한 考證이 더욱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한기춘·서정철·최순화(mc맥한의원·우리경희한의원·보광한의원)

〈참고문헌〉
지면관계로 아래 표에서 일부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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