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 대륙 25여개 국가 참여한 플라시보 학회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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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대륙 25여개 국가 참여한 플라시보 학회를 다녀와서…
  • 승인 2017.04.1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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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슬

이예슬

mjmedi@http://


Society for Interdisciplinary Placebo research (SIPS) Conference

 

이 예 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박사과정 5기

튤립과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와 고흐의 고향이자 아인슈타인이 공부하기도 했던 나라로, 문화와 과학의 분야 모두에서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이 곳 네덜란드의 가장 오래된 대학은 1600년대에 설립된 라이든 대학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곳에서 올 봄에 첫 플라시보 (Placebo) 학회가 열렸다. 기존의 플라시보 연구는 유럽과 미국 등지의 그룹 단위로 연구와 발표가 이루어졌던 데에 비해, 이번 학회는 처음으로 5개 대륙에서 25여개의 국가가 참여한 첫 공식 학회라는 의미가 있었다.

지도교수인 채윤병 교수는 이번 학회에서 좌장으로 초청받아 가게 됐는데, 마침 플라시보 효과는 지난 1년 여간 내가 진행했던 연구 중 하나와 관련한 주제기도 해서 내 연구 내용을 다른 연구자들에게 소개할 기회이기도 했다. 나와 교수님,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이명수 박사, 그리고 독일 튀빙겐에서 유학중인 이인선 박사는 이번 학회에 유일하게 참석한 동양 연구 그룹으로서 참석하게 됐다.

이번 학회는 제 1회로 개최됐음에도 전세계에서 플라시보와 관련해 잘 알려진 저명한 연구자들을 모두 초청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했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책을 저술했으며 플라시보 연구의 대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파브리지오 베네데띠(Fabrizio Benedetti)는 지금도 활발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특히 높은 고도에서 산소부족의 상황에 산소를 공급하는 컨디셔닝 이후 플라시보 효과를 유도하는 과정은 기발하고 명쾌했다. 

첫 기조 연설은 플라시보 연구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테드 캡트척(Ted Kaptchuk)이었다. 플라시보 효과에 대해 의학, 뇌과학, 심리학뿐만 아니라 인류학과 같은 인문학적 접근을 포함한 다학제적인 연구를 수행한 그는, 우리에게는 침 연구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플라시보 효과를 나타내는 요인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했는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기대감이라는 요소와 희망이라는 요소, 불확실성의 정도가 미치는 플라시보 효과의 크기 등에 대해 논했다.

강연에서 과학적 연구에 기반한 근거와 인류학 및 역사를 아우른 인문학적 고찰을 모두 포괄해 설명하던 그는, 최근 플라시보라는 점을 환자에게 고지하고 그 효과를 알아보는 open-label 연구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했다. 또 강연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예측부호화(Predictive coding)를 제시했다. 이는 최근 통증에 대한 연구에서 시도한 주제기도 한데, 두뇌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의 자극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정도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이번 학회에서 플라시보에 적용한 연구를 우리 연구실을 비롯해 다른 연구실에서 시도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플라시보에 대한 연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연구 윤리이다. 환자에게 진짜 약이라고 설명하거나, 혹은 진짜 약이거나 가짜 약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해서, 환자가 자신이 복용하는 치료제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연구 윤리에 어긋나는 것일까? 나아가, 플라시보를 포함한 연구 디자인에서 환자에게 사전에 연구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기초의학 및 심리학에서 이루어지는 플라시보 연구뿐만 아니라, 이중맹검연구를 비롯한 임상 연구에서도 플라시보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며 이것이 환자의 인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 연구에는 어떤 결과를 미칠지는 많은 연구자들이 고민해온 부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회에서 자리를 마련해 첫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철학적, 윤리적, 임상적 관점에서 플라시보의 연구 및 임상에서의 윤리에 관한 의견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세션도 인상깊었다. 

환자에게 의사가 증상을 설명하는 과정은 플라시보 효과뿐만 아니라 노시보 효과에서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신경병증을 가지고 있는 당뇨 환자에게 “환자분의 신경이 망가지고 있네요” 라고 지적하는 것에 비해, “환자분의 당뇨병은 신경에도 영향을 미쳐 증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라고 구체적인 원인과 결과를 들어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과정은 환자에게 막연한 불안감을 배제하고 추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통증을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의사-환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플라시보 효과는 기대감과 치료받을 당시의 감정 등 환자의 심리적인 요소와, 더해서 치료에 대한 불확실성, 치료 방법과 과정, 의사-환자 관계, 사회적/장기적 학습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에 따라 예상할 수 있는 플라시보 효과의 정도가 다르기도 하다. 어떤 요소가 플라시보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은 기초 연구와 임상 연구를 모두 아울러 진행되고 있는 연구 주제였으며, 다양한 연구 방법론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번 학회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연구를 소개했던 과정은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 연구실에서 진행한 두 가지 연구는 플라시보 효과에 미치는 가격의 영향과, 플라시보 컨디셔닝을 통해 통증을 예측하는 베이지안 코딩이었다. 우리 연구실 이외에도 독일의 다른 연구 그룹에서 유사한 주제를 통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다른 그룹이 비슷한 주제로 다른 방법론을 적용하여 연구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우리 연구를 소개하고, 다른 연구자의 연구 과정을 보며 피드백을 받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학회에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 중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최근의 연구는 환자 혹은 실험참가자가 인지하지 않은 무의식적인 자극을 통해서도 플라시보 효과가 나타날 수 있으며, 그 반응에 있어서는 환자 혹은 실험참가자가 통증 혹은 증상을 직접 평가하는 인지적 반응이나 뇌활성 반응뿐만 아니라 피부전도도를 비롯한 생리적 반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플라시보 효과가 단순히 가짜 약에 의한 가짜 효과가 아니라 다양한 요소에 의해 조절될 수 있으며, 임상에서는 그 효과를 최대화하여 환자의 치료과정에 접목해야 한다는 점을 일관적으로 지적한다.

이번 학회에서 크게 관심을 보인 분야는 플라시보의 조절 가능성이었다. 플라시보 효과를 예측하고, 나아가 이를 조절하는 것이 연구를 통해 가능하다면, 앞으로 임상에서도 플라시보 효과를 조절하여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미래의 플라시보 학회에서는 기초 및 임상연구에서 플라시보 효과를 구체적으로 조절한 결과가 발표될 수 있을지, 그리고 이것이 실제 임상에서 적용된 사례도 찾아볼 수 있을지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 궁금해진다. 더불어 나도 이번 학회에서 얻은 자극을 바탕으로 더욱 노력하여 연구하고자 다짐하며 이 참관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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