痘後餘熱未凈治病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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痘後餘熱未凈治病案
  • 승인 2016.09.3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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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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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名醫醫案(276)-金性璂의 醫案(2)

病者가 8년전부터 이 병에 걸렸었는데, 현재의 증상은 머리, 얼굴 및 전신에 癮疹과 같이 水膿이 잡혔고 血液이 흘러나와서 멀쩡한 곳이 드물었다. 診察해본 자들이 혹 大風瘡이라 하거나 或 梅毒瘡이라 하여 東西醫藥으로 百方으로 治療하였지만 터럭만한 효과도 없었다. 혹은 풍토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다른 지역의 풍토로 바꾸어 거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였고, 겸하여 식욕이 부족하고 잠을 제대로 못자서 점차로 위독해졌다. 치료법은 療熱解毒湯三貼. 連翹, 防風各二錢 羌活, 柴胡, 南星, 半夏, 桔梗, 前胡, 牛蒡子, 枳殼, 赤伏令, 荆芥穗, 川芎去油, 甘草 各一錢. 이것을 음식과 시간을 멀리 떨어지게 해서 두 번 복용해서 완전히 치료되었다. 이 증상은 痘後餘熱未凈이 原因이다. 脉度가 左右寸脉은 緊濡하고 左右尺脉은 沈滑하고 左右關脉은 浮且洪大함으로 痘後餘熱로 判明하였다. (病者가 八年前붓터 此病에 罹하얏는대 現症은 頭面及全軆에 癮疹과 如히 水膿되고 血液이 流出되야 空間이 少하다. 診察하는 者는 或은 大風瘡이라 하며 或은 梅毒瘡이라하야 東西醫藥으로 百方治療하되 毫末의 効能이 無하얏다. 或은 水土의 關係라 하야 異域水土에 換處함이 必要하다 하야고 兼하야 飮食의 欲이 乏하고 睡眠의 力이 渴하야 漸次로 危篤에 瀕하얏다. 療法에 對하야 療熱解毒湯三貼(連翹、防風各二錢 羌活, 柴胡, 南星, 半夏, 吉更, 前胡, 牛方子, 只角, 赤伏令, 荆芥穗, 川芎去油, 甘草 各一錢)을 食遠日再服하야 完差하얏다. 理由는 痘後餘熱未凈이 原因이다. 脉度가 左右寸脉은 緊濡하고 左右尺脉은 沈滑하고 左右關脉은 浮且洪大함으로 痘後餘熱로 判明하얏다.) (1924년 『東西醫學硏究會月報』제2호, ‘特効方’)

按語) 金性璂先生(1879~?)은 東西醫學硏究會를 창설하여 韓醫師들의 대동단결에 힘쓴 韓醫師이다. 東西醫學硏究會는 1923년 창설된 한의사들이 중심이 된 학술단체이다. 그는 慈生醫院이라는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환자의 진료에도 힘썼다. 진료를 하면서 特效方의 수집에 정열을 기울여 몇 개의 처방을 잡지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사용한 처방은 그의 특효방 중의 하나로 소개된 것이다. 이 醫案은 1924년 간행된 『東西醫學硏究會月報』제2호의 ‘特効方’이라는 제목으로 치료경험을 적은 것이다. 제목 바로 앞에 ‘淸州郡 金○○ 年二十七’라는 작은 글씨의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환자는 27세의 김씨 성을 가진 인물로 서울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痘瘡은 오랜 기간 한국인을 괴롭혔던 전염병이다. 급성 발진성 전염병으로서, 천연두를 말한다. 처음에 점이 생겼다가 진물이 차 오르는 것이 마치 꽃봉오리가 피는 것 같고 7일이 지나 收靨, 脫痂가 된다. 이 때 모양이 꽃이 시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天花라고도 한다. 이 환자는 10대 시절에 두창을 앓은 후에 완벽한 치료를 하지 않아서 “머리, 얼굴 및 전신에 癮疹과 같이 水膿이 잡혔고 血液이 흘러나와서 멀쩡한 곳이 드물었다”는 증상을 갖게 되었다. 이에 두창후유증을 치료하는 療熱解毒湯을 먹이게 된 것이다. 療熱解毒湯은 기존의 의서에는 이러한 명칭을 찾기 어려운 金性璂先生의 創方으로서 連翹敗毒散의 변방이다.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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