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722> - 『交隣須知』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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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722> - 『交隣須知』②
  • 승인 2016.04.0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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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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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외교의 주역, 의학자 雨森東


지난 주 대마도에 들러 향토민속자료관에 소장된 몇 가지 조선판 의학서를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소중한 조선의서를 보게 된 것도 좋았지만 자연스럽게 대마도를 거쳐 이루어진 조선통신사의 여정과 이를 계기로 행해진 의약교류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조선 후기 조일간의 외교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를 손꼽을 수 있고 그가 엮은 조선어교본이 바로 『교린수지』이다.

◇『교린수지』

이 책은 비록 역관들을 위한 조선말 교재로 저술되었다고 하지만, 우선 저자인 雨森芳洲가 원래 의사출신인데다가 내용 가운데 의약이나 약재거래에 대한 내용이 상당수 출현해 눈여겨볼 만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雨森芳洲는 한 · 일 교류에 상징적인 대표 인물이자 대마도를 빛낸 위대한 인물로 받들어 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원래 대마도 태생이 아니라 교토 인근의 현재 滋賀縣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의원이었으며, 그는 교토에서 성장하면서 가업을 잇기 위해 의학공부를 하다가 훗날 儒學을 익혔다. 그는 어려서 9살 나이에 한시를 지을 정도로 영민했다고 하며, 17~18세 무렵 당시 대학자인 키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원래 이름은 東五郞으로 芳洲는 그의 호이다. 또 다른 아호로 橘窓이란 이름을 쓰기에 그의 문집으로 『橘窓茶話』, 『橘窓文集』이 있다.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는 약칭으로 東자 1자만을 사용하여 ‘雨森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아마도 조선식 이름자와 상응하여 3자 이름을 대외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도 저자명이 ‘雨森芳洲’와 ‘雨森東’을 혼용해서 기록하고 있어 일종의 필명처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1689년 스승의 추천으로 쓰시마번에 관리로 등용되었다. 당시 쓰시마번은 幕府로부터 對朝鮮 업무에 외교적 전권을 위임받아 수행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조선으로부터 대일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조선과의 유일한 대외교류 창구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번정부는 조선과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 학식이 높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다.(이하『先哲叢談』참조)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그는 쓰시마번에서 조선방좌역(朝鮮方佐役, 현 외무부 차관급)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3년간이나 부산으로 건너와 머물면서 조선어는 물론 한글까지 습득하였으며, 조선말, 중국어, 일본어 등 3개 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당대 보기 드문 인재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이러한 재능을 밑바탕으로 2번이나 조선통신사 眞文役(접대와 문서관리 담당역)을 맡아 수행하였고, 훗날 조선과의 외교 현장에서 체험한 바를 서술한 『交隣提醒』을 펴냈다. 책 속에서 그는 조선에는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 취미, 기호가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일본만을 기준으로 대응하면 편견과 독단이 생기고, 오해를 초래하여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가 지은 이 조선어 교과서 『교린수지』는 여러 차례 중간을 거듭하면서 메이지(明治) 초기까지 사용되었으며, 1904년에는 前間恭作에 의해 京城에서 발행되기도 하였다. 평소 그는 “말을 배운다는 것은 한 나라의 풍속과 관습을 배우는 일이며, 한 민족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하여, 언어 습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서 상호이해의 경지에 이르는 길임을 말하고 있다. 다음 호에서 본서의 구성과 내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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