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718> - 󰡔先哲叢談󰡕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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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718> - 󰡔先哲叢談󰡕②
  • 승인 2016.03.0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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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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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儒學의 餘波, 라잔과 진사이


지난 호에 예고한 것처럼 이 책에는 일본의 저명한 유학자들의 사전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록인물 가운데 의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의약서를 저술한 인물을 중심으로 몇 사람 儒醫들의 사적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 올리고자 한다.

 

 

◇ 『선철총담』

가장 먼저 주목할 사람은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그는 일본유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의 고제이다. 후지와라는 정유재란 때 잡혀가 훗날 『看羊錄』을 집필하여 잘 알려진 조선 선비, 姜沆(1567~1618)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조선 성리학을 기초로 학문을 닦았다.

라잔은 일찍이 교토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수재로 알려졌고, 1595년 겐닌지(建仁寺)에서 불교를 배우지만, 승적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집에서 독학으로 성리학에 전념한다. 1604년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배우게 되었는데, 후지와라는 하야시 라잔의 영민함에 감명을 받아,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를 천거하였고 23세 약관의 나이에 라잔은 도쿠가와가의 사부로 발탁된다.

그는 쇼군의 스승이 되었고 지금의 도쿄 우에노공원에 學問所와 先聖殿을 건립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도쿄대의 원류라고 일컬어지는 쇼헤코(昌平黌)의 기원이며, 에도시대 유학의 총본산이자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는 大學頭라는 존칭으로 불렸고 그의 후손은 대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유학자로서의 위상 못지않게 의학자로서 다수의 저술을 남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多識篇』, 『本草序例註』와 같은 본초서를 펴낸 바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인 林恕 또한 고명한 유학자이자 박물학자로서 鵝峰이란 호를 사용했는데, 黑川道祐(?~1691)가 지은 醫史學書 『本朝醫考』(191회 愛憎이 엇갈리는 고대 醫學史의 片鱗, 2004년3월1일자) 와 奈須恒德의 『醫方聚要』, 山本玄通의 『鍼灸樞要』에 서문을 지어 주기도 했다.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 역시 대단한 학자로서 교토에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엔 宋儒를 받들어 주자학을 배웠으나 37~38세에 이르러 『대학』이나 『중용』이 후대에 불교나 노장사상이 혼합된 불완전한 텍스트로 치부하여 전면 부정하고 공자와 맹자의 언행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古義学을 제창하고 古義堂이라는 자신의 호를 딴 학당을 운영하였다.

주요 저서로서 『論語古義』,『孟子古義』,『語孟字義』,『中庸発揮』, 『童子問』등을 들 수 있지만, 저작보다는 주자 사상의 요체인 理를 반대하고 오히려 精을 바람직하게 평가했다는 점이 획기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물질이 아닌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표상이나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생각보다는 좀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감정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논리에 부합하는 사고만으로 현실이나 사물을 인식하려는 일이나 판단이나 추리만으로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인식이나 지식에 토대한 직관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으로써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려는 방법을 이용하여 학문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一本堂行餘醫言』을 저술하고 儒醫一本論을 주창하여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저명한 의가 香川修庵(1683~1755)은 이토 진사이의 문하에서 古學을 배운 의학자이다. 대개 그의 주장은 이토 진사이의 학문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 시대를 주도하는 학문사상은 당대 사회 혹은 차후 세대에 변화와 개혁을 가져오는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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