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정의 도서비평] 부끄러움과 부지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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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정의 도서비평] 부끄러움과 부지런함
  • 윤희정
  • 승인 2016.01.2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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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비평 | 「인간과 상징」
 
‘스스로 깨달은 자가 홀로 옳은 것을 생각할 때, 수 만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것을 들을 수 있다.’ 새 학기 첫 수업을 여는 멘트다. 내 이름 소개보다도 학생들에게 먼저 전하는 이 말은 생전에 동양 사상, 주역, 한의학 침술에 깊은 존중을 품었던 카를 구스타프 융의 언급이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의사이자, 영적 길잡이인 융의 말로 학기를 시작하는 것은 매년 봄에 치르는 나만의 의례이다.

카를 융(외) 共著
김양순 譯
동서출판사 刊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라는 회고대로 융은 전 생애를 인간의 무의식 탐구에 바쳤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엔 억압된 충동이 있다고 제시한 바 있다. 융은 그것을 넘어 무의식이 가장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유형으로, 정신활동의 원천임을 알아챘다.

오래 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와 융이 공저한 「자연의 해석과 정신」을 읽고 전율과 충격으로 앉은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온 몸이 돌처럼 굳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이후 융은 내 정신 속에 ‘깊이 탐구할 대상’으로 남았다.

세상사가 인과 법칙을 따른다는 지배적 사고에 파문을 일으킨 융의 창조적이고도 독보적인 ‘비인과적 동시성 원리’는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보여준다. 그는 독특한 사유를 치밀한 사례연구로 증명한다. 사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생활의 소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삶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일상의 신비에 삶을 바쳐 탐구한 융의 성실성 앞에 숙연해지고 만다.

잡설이 길었다.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떨리며 밤새 떠들 만큼 나의 모든 존경은 그를 향한다. 본격적으로 융 전집을 탐독하며 2015년을 마무리했는데, 그 덕에 작년은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해가 되었다. 융에 온 정신을 쏟느라 머리감을 시간마저 아까워 가발 회사를 알아보았다. 지적 성장보다 더 값진 존재론적 도약의 시간들이었다.

많은 저서 중, 「인간과 상징」을 오늘 꺼낸다. 이 책을 읽으며 꿈이 개인의 무의식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요소인지 알게 된다. 꿈이 단지 우연적 산물이 아니라 무의식과 의사소통 하는 하나의 의미심장한 사적 표현임을, 그래서 도식적인 꿈해석이 얼마나 가소로운 짓인지 알 수 있다. 의식의 세계에만 파묻힌 사람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무의식 영역과 일상에서의 그 놀라운 영향력을 목도한다. 융은 바로 이 지점, 즉 의식과 무의식이 한 개인 안에서 조화롭게 서로를 보충하며 공존하여 전체로 통합되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

융은 프로이드의 자유연상 출발점으로서 꿈의 도식적 해석에 맞서, 꿈 자체의 무의식 내용들에 관심을 가지며 프로이드와 결별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분석심리학이 탄생하는 계기다. 프로이드와의 갈등에서 융을 통해 냉철함은 반드시 사랑을 품어야함을 배운다. 수많은 비난과 오해 속에서 철저히 고립된 채, 묵묵히 자신의 사상을 키운 그에게서 고독은 영웅의 필수품임을 깨닫는다. 은둔과 고독은 호수와 돌, 헌신적인 학문탐구와 함께 융의 생애를 구성하는 5요소이다.

우리 삶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인류의 원형적 상징들을 탐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연애중이거나, 반려자를 구하는 이들에게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이론이 진실한 짝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 엄청난 소득이지 않은가.

융이 중점을 둔 대극의 통합은 헤르만 헤세의 문학 주제이기도 하다. 융이 자신의 사상을 헤세의 문학을 빌려 표현한 까닭이다. 인간 내면의 이성과 광기, 질서와 카오스 사이에서 고뇌하는 주인공 하리 힐러를 앞선 서평도서 「황야의 이리」에서 만났었다. 「데미안」에서도 융의 뚜렷한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융과 헤세에 정통한 독자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비밀을 금세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상징」을 읽으며 또 한 사람, 니체를 떠올린다. 융의 재생과 니체의 영원 회귀사상, 통합된 자기와 위버멘쉬(초인)가 오버랩된다. 융과 달리 니체는 개인의 의지로 자기를 극복하여 초인에 도달할 것을 주장했다. 어쨌든 니체는 괴테와 더불어 융의 스승이었다.

아웃사이더로 방황 끝에 귀향하는 하리 힐러, 융, 서른에 세상을 떠나 10년 후 동굴을 나선 짜라투스트라. 이들은 하나였다. 이쯤에서 나에게 동화된 이라면 다음 서평을 눈치챘을 터.
부지런하고 희생적인 한 의사의 삶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부끄러움은 변화의 동기다.

물론, 부끄러움은 반드시 부지런함으로 이어져야한다. 많은 이들이 융을 만나며 부끄러움을 오롯이 느끼기 바란다. 35~40세에 처한, 제2의 인생을 위한 존재론적 도약을 꿈꾸는 이들에게 특히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보다 많은 것을 얻고 싶다면, 「인간과 상징」을 시작으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자. 내면 탐색, 융의 마지막 조언이다. 

윤희정 / 광주광역시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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