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옥고 유래 및 변천…신라사신이 광리방 요청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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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옥고 유래 및 변천…신라사신이 광리방 요청한 이유는?
  • 승인 2015.10.0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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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호 기자

김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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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학회, 의학사료 연구 재조명 학술대회 개최

◇의사학회는 ‘한국의학사 정립을 위한 의학사료 연구의 재조명’을 주제로 지난달 23일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김춘호 기자>

[민족의학신문=김춘호 기자] 한국의사학회(회장 김남일)는 ‘한국의학사 정립을 위한 의학사료 연구의 재조명’을 주제로 지난달 23일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술대회에는 의학사료 연구의 재조명이라는 맥락에서 한국 한의학의 정립을 위한 다양한 학술발표가 있었다.

안상우 박사(한국한의학연구원)는 ‘경옥고의 유래와 임상응용의 변천’을 중심으로 한 발표를 통해 “경옥고는 송대에 고려와의 교역을 통해 입수한 신라인삼을 주재(主材)로 1170년경 송대 의서에 장생불로의 신선방으로 처음 기록된 이후 역대 의서에 자주 등장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조선시대 단계의학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선의 의학자들은 ‘동의보감’에서 내경편 첫 번째 처방으로 경옥고를 수재했으며, 이후 양성연년약이(養性延年藥餌)의 대표방제로 자리매김했다”라며 “조선의 의학자들은 경옥고의 다양한 효능과 주치증에 노채(勞瘵)와 중풍후유증으로 인한 탄탄(癱瘓)에 이르기까지 그 주치 범위를 확장했으며, 역대 의서의 가감활용을 두루 응용·전승함으로써 오늘날 대중적인 장수약제로 알려지는데 일조했다”라고 발표했다.

이현숙 박사(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는 ‘803년 신라사신은 회남절도사 두우에게 왜 광리방(廣利方)을 요청했을까’제목의 연구를 발표했다.

이 박사는 “고구려 유민계인 이정기 일파가 산동반도를 점유하고 있던 시기(758년~819년)에 회남의 수도 양주는 신라 사절단의 기착지이자 출발지였다”라며 “신라로 출발하기에 앞서 광리방의 출간 정보를 알게 된 박여언이 새로운 의학서를 신라로 반입할 수 있도록 필사본을 요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광리방은 그 방의 분류가 63종이고 총 수가 586수라고 한다. 그러나 실전돼 여타의 의학서에 인용돼 있는 몇몇 처방을 통해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발표했다.

현재 남아있는 광리방의 조문들을 모아 분석해보면 기존 의학서와는 달리 대중의학서를 지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이 박사는 말했다. 복잡다단한 처방이 아니라 단방 또는 2~3가지 약재를 갖고 민간에서 손쉽게 조제할 수 있는 처방이 주류를 이루는 의학서라는 얘기다.

이 박사는 “나당연합군으로 신라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두창이 유입됐고 성덕왕과 경덕왕대를 이어 신라는 두창으로 사상자들이 많아 인구 감소가 심했다”라며 “이를 타개하고자 신라는 당 의학의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광리방의 도입도 그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김남일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의학사료에 대한 조명은 의사학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로, 연구자들은 항상 적합한 의학사료를 살피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주단계의학은 어떻게 해서 명대의학의 주류가 되었을까?(차웅석 경희대 청강한의학역사문화연구센터장) ▲한의과대학에서의 醫史學 수업에 대한 제언(김용진 대전대 한의대 교수) 등의 주제 발표와 함께 ▲世宗代 醫員活動 硏究(송지청 대구한의대 한의대 교수) ▲조선시대 의관직 審藥에 대한 고찰(박훈평 화순마루병원 과장) ▲국내 학술지를 통해 살펴본 辨證의 고찰(이태형 경희대 한의대 박사) ▲醫學入門 命門形狀의 유래와 의의(조학준 세명대 한의대 교수) ▲嫁到中國皇室的朝鮮女人們(鄭賢月 中國 遼寧省 大連大學校) 등의 학술논문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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