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탐방기 - 고수정(청년한의사회)
상태바
베트남 탐방기 - 고수정(청년한의사회)
  • 승인 2003.10.10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전쟁의 아픔, 한의학으로 속죄한다


2001년에 결성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는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면서 2001년과 2002년 3월에 각 1주일간 베트남 중부지역의 ‘꾸앙응아이성 썬틴현과 빈선현 의료센터’에서 무료치과진료를 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베트남 진료, 민간단체와의 연대,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에 대한 지원활동 등으로, 청년한의사회가 이 활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다음은 내년 3월 진료에 참여하기 앞서 청년한의사회의 고수정 회원(경기 서린한의원)이 지난달 21~28일 베트남을 사전답사한 내용이다. <편집자주>


베트남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호치민에 도착해서도, 여기가 30년 전 전쟁터였다는 느낌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지역 진료를 위한 답사를 왔지만, 큰 부담은 느껴지지 않았다. 베트남의 따뜻하고 습한 날씨와 독특한 음식 향이 3년 전 배낭여행을 올 때처럼 마음을 설레게 할 뿐이었다.

호치민에서는 호치민대학을 방문하여 베트남 의료체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진료에 협조를 구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하고 다음날은 내년에 진료를 하게 될 빈딘성으로 떠났다.

빈딘성에서 찾아 간 곳은 한국군 맹호부대가 설립한 한월문화센터로 현재 전쟁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거기엔 이미 폐관시간이 지났음에도 우리 일행을 위해서 전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 한국군의 만행 현장

직원들은 특별히 전시되어 있지 않은 자료들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인하여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성별 나이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이 노인과 어린아이, 여성들이었다.

또 어느 지역은 집집마다 앞마당에 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군인에 쫓겨 집안으로 들어간 가족들이 몰살당한 후 시신이 너무 망가져서 옮기지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 1시간 가량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왔을 때 해는 어둑어둑 저물고 있었다. 친절히 설명해 준 직원들의 얼굴도 볼 수 없었고, 다만 꽉 막혀버린 가슴 때문에 큰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은 어쩔 수 없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고 하지만 베트남에 너무 많은 죄를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진료를 위해 빈딘성의 퀴논시에 있는 종합병원 2곳과 안년현, 따이선현의 의료센터, 그리고 따이빈사의 보건소를 둘러보았다. 의료공급의 양과 질이 주민들의 요구만큼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만큼 의료체계는 그런대로 잘 잡혀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1977년 이후 베트남 전통의학 육성·발전을 위해 정부차원에서 노력중이라고 하고 각각의 현(우리나라 구정도 됨) 까지는 병원에 한방과가 있고 한의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에는 농민들이 많고 만성질환이 많은 관계로 한의학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았으나 이를 다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우리 팀에 요구하는 것도 진료뿐만 아니라, 학술적 교류, 장비지원 등 여러 가지였다.
베트남에서 특이한 것은 백내장과 구개열 환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 수요 높은 한의학(越醫學)

한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의 NGO와 베트남 정부에서도 이러한 환자들을 치료하고 수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편이고, 또한 매년 환자 발생율이 높기 때문에 모든 환자들을 책임지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백내장·구개열 환자가 많은 것은 고엽제 피해나, 영양부족이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병원을 모두 둘러보고 진료장소를 정한 다음, 고자이 마을이 있는 따이빈사에 들려 위령비 참배를 했다. 학살로 인해 마을 전체가 없어지고 생존자 자체도 없는 그곳에 사람들은 터를 다져서 위령비를 세웠다. 380명의 무덤위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미침략 적군에 대한 증오를 깊이 새긴다. 이곳에서 1966년 2월 26일 미제국주의 꼭두각시였던 남조선 군대가 무고한 380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

베트남은 1990년 이후 증오비라는 이름도 위령비로 바꾸고 한국과도 활발한 수교를 하고 있다. 한국인을 만나도 적대감이나 증오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한국의 자동차와 연예인·드라마를 좋아하지만 진정으로 한국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사라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쩜 위령비에 새겨진 그 굵은 글씨만큼이나 깊이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 위령비에 새겨진 ‘증오’

한국군 학살현장에서 살아난 ‘뻔’아저씨의 당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힘들게 버티고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세월을 통해 다듬어 져서 평원해 보이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보였다.

빈딘성에서 호치민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빈딘성에선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그 많은 학살 사실을 내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 너무 버겁고 힘들었나 보다.

하지만 그건 잊혀진 것이 아니고,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가슴이 답답해 온다. 진정 이러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 알 수는 없지만 평화의료연대에의 진료 활동이 베트남민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에 도착하니 반대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으로 기울어 가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증오비에 세워졌던 글귀가 떠올랐다.
‘하늘에 사무친 원한 자손만대 대대손손 기억하리라.’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전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론은 너무나 단순하다.

첫째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는 특히 이익을 위한 침략전쟁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전쟁이라는 것은, 정치인들이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와 같은 일반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큰 살인이라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