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658] 名筆 傅山이 남긴 대표의서 3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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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658] 名筆 傅山이 남긴 대표의서 3종
  • 승인 2014.11.2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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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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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靑主醫書」①

明末淸初를 대표하는 의학자로 傅山(1606∼1684)이 있다. 우리에게는 傅靑主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게 알려져 있는데, 그는 葉天士, 陳士鐸과 함께 명청 교대기 중국을 대표하는 의가로 손꼽힌다. 그러나 조선의학에도 널리 쓰여진 「석실비록」이 진사탁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본디 傅山의 遺著를 가져다가 후인이 보충하여 정리한 것이라고 하니 두 사람을 나란히 竝稱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644회 「石室方藥類聚」편 참조)
◇「부청주의서」

傅山은 어린 시절에는 鼎臣이란 이름을 썼다가 후에 改名했으며, 字는 靑竹, 靑主, 또는 仁仲이라 했다. 별호로는 公之佗 또는 公他, 石道人, 眞山, 濁翁, 丹崖翁, 朱衣道人 등 여러 가지이고 筆名으로 嗇廬, 石道人 등을 사용하였다. 생전에 살던 곳은 지금의 山西省 太原市에 해당하는 陽曲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대로 학문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鄕試에 단독으로 입격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反淸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자 道士를 자칭하고 토굴을 짓고 숨어살며 의술을 업으로 삼았다. 그의 나이 39세에 이르러 明이 멸망하자 몸을 숨겨 가족들과 함께 깊은 산속에 칩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청나라가 건립되자 康熙帝가 그를 불렀으나 극구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72세 되던 해에는 內閣의 中書舍人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평생을 시골에서 지내며, 환자들을 돌보는 일로 일생을 다하였다. 집에는 많은 秘方이 갖춰져 있어 그에게 찾아와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전해진다.

특히 傅山은 유명한 의가일 뿐만 아니라 文學家이자 서예가로서 더욱 알려져 있다. 그에 뛰어난 서예의 품격과 예술성은 국내 미술사학계에서도 여러 편의 논문이 나올 정도로 널리 유명하다. 시, 서화에 모두 능하여 개성이 강한 墨竹이나 산수화를 즐겨 그렸고 글씨에 특출하였다. 그의 서풍은 자유분방하여 王鐸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經史百家를 비롯하여 시문, 서법, 회화, 그리고 불가, 노장, 금석학, 의경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박식했으며, 經世致用의 실학을 제창했다. 또한 그는 程朱理學에 반대하여 공개적으로 異端임을 자처하였으며, 스스로 자신을 老莊 학자라 칭했다. 아울러 經과 子를 통합해서 보자는 經子不分論을 주장했고, 전통적인 유가의 道統論에도 반기를 들었을 정도로 소신 있는 학자였다.

저서로는 「性史」와 「十三經區分」, 「周易音釋」, 「周禮音辨」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지금 전해지는 저술로는 시집 「霜紅龕集」이 알려져 있으며, 「荀子批改」, 「荀子評注」, 「淮南子評注」, 「莊子批點」, 「兩漢姓名韻」, 「金剛經批注」 등이 있다. 대표적인 의서로는 「傅靑主女科」, 「傅靑主男科」, 「傅氏幼科」 등이 있는데, 남성과 여성 질환을 구분하여 독립적인 전문분과로 다룬 것이 특징적이다. 이 책에는 남과와 여과, 그리고 부록으로 산후편이 붙어 있는데 마지막 편이 幼科인 셈이다. 3가지 저술이 한 책에 모두 집합되어 묶여 있으니 간략하게나마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傅靑主男科는 원래 抄本으로 전해졌으나, 182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 간행본이 나왔다. 전2권으로 되어있으며, 내과, 잡병의 證治를 위주로 상한과 화증, 鬱結 등 23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문마다 병증별로 나누어 먼저 병론을 싣고 뒤에 처방을 적었으며, 권미에는 잡병, 소아과 등을 덧붙였다. 상세한 구성과 편제 및 수록내용의 특징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다음 회를 기약하기로 한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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