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著, 푸른역사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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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著, 푸른역사 刊)
  • 승인 2003.08.2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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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에 묻혀있는 조선 명의들의 얘기


“성의식과 연애방법, 도박꾼과 투전의 역사 등 시시한 이야기야말로 인간들의 리얼리티가 아닐까”
저자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의 이런 의문에서 탄생한 것이‘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다.

이를테면 역사서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던 조선의 개똥이·소똥이들의 이야기다.
‘군도와 땡추’‘감동과 어우동’‘검계와 왈자’ ‘탕자’등 10장으로 구성된 책에는 기생·도박을 주름 잡았던 당대의 깡패 ‘왈자’, 유행을 주도했던 오렌지족 ‘별감’에서부터 40여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던 양반집의 처자의 이야기까지 생생한 민중사가 펼쳐진다.

이 가운데 제1장 ‘수만 백성 살린 이름없는 명의들(민중의)’에 특히 시선이 꽂힌다.
30페이지 분량의 이 章에서는 정식 의과 코스를 밟지 않고 수많은 환자들을 보살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몇 토막만 추려보자.

●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민중들

조선 궁중에서 임금의 약을 조제하는 내의원이 있고, 대궐내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거나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전의감이 있었고 일반백성들을 위해서는 혜민서와 활인서가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서민기관도 서울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민중들은 의료혜택에서 제외됐다.
양반 중심의 사회에서 의관은 권력의 언저리에 머무는 우스운 수준이었으니, 의원에 관한 기록도 많지 않다.

● 의업의 정도를 실천한 민중의 趙光一

의원가문은 따로 있었고, 원래 전문직인 의원은 중인에 속한다. 鍼醫 조광일(호 鍼隱)은 의원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의서를 광범위하게 본 위인도 아니었다. 그는 가죽 주머니 속에 구리침·쇠침 열 개를 넣고 다니면서 악창을 터뜨리고 상처를 치료하며 어혈을 풀고 풍기를 틔우고 절름발이와 곱추를 일으켜 세웠다. 즉시 효험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없어 명의라 불렸다.

한 노파가 아들의 치료를 청하자 주저없이 따라나서는 조광일을 보고 홍양호(1724~1802)가 시정의 보잘 것 없는 백성들이나 치료하고 다니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조광일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세상 의원들이 제 의술을 믿고 교만을 떨며 서너 번 청을 한 뒤에야 몸을 움직이는 작태를 미워한다. 불쌍하고 딱한 사람은 궁박한 백성들이다. 내가 침을 잡고 돌아다닌 지 십년이 넘었고 그 동안 살려낸 사람은 수천 명은 될 것이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니 십년이 지나면 아마도 만명은 살려낼 수 있을 것이고 만 명을 살려내면 내 일도 끝날 것이다.”의업의 正道가 담겨있는 말이다.

● 마의에서 어의로, 종기 치료의 신기원을 연 白光鉉

외과수술이 발전하지 않은 가운데 백광현(1625~1697)은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해 종기 치료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다. 원래 馬醫출신이었던 그는 오로지 침을 써서 말의 병을 고쳤고, 사람에게 적용했더니 효험이 있어 전업해 임상경험을 풍부하게 쌓았다.

의과방목(의과 합격자 명단)에는 그 이름이 없는 무면허 출신 백광현이 태의, 즉 어의가 된 것은 신의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던 종기치료술 덕분. 조선 현종 때 내의원이 된 백광현은 숙종 때는 현감에 까지 이를 정도로 대단한 출세를 했다. 하지만 출세 후에도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환자에게 온 정성을 쏟아 민중에 대한 헌신적 의료를 잊지 않은 민중의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 떠돌이 약장수의 벼락출세 皮載吉

피재길은 고약으로 유명한 腫醫. 원래 의원가문 출신이었던 피재길은 어려서 부친을 잃은 탓에 의서는 접해보지도 못했는데 모친으로부터 아버지 생전에 보고 들었던 고약처방을 전해 듣는다.

정조 17년 정조의 머리에 작은 종기가 나 번져갔지만 내의원에서도 손을 쓰지 못하자 당시 고약을 팔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피재길이 불려갔다. 왕은 피재길이 만들어 올린 웅담고가 효과를 보이자 내의원 침의에 임명했다. 정조실록 17년(1793)에 실린 얘기다.

● 시체탕으로 임금의 병을 고친 柳상

미명의 인물이 궁중의 어의로 등극케 할 정도로 대단했던 종기치료술. 즉 생사를 위협했던 종기와 함께 전염병은 조선시대 최고의 사망원인이었다. 유상은 숙종과 그의 아들 천연두까지 치료해 벼슬에 올랐다.

젊은 유상은 경상도 감사의 冊室로 따라갔다가 우연히 머물게 된 집에서 주인이 출타한 틈을 따 의서를 보게 된다. 돌아온 주인은 유상을 책망하며 빨리 떠날 것을 채근했다. 유상이 서울 근교에 다다르자, 그곳에서는 별감 10여명이 임금의 천연두를 고치기 위해 유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의 꿈에 神人이 나타나 유의원을 불러오라고 했다는 것.

끌려가던 유상은 입궐하던 중 마마를 앓고 난 아이를 업은 노파를 보고 무슨 약을 썼냐고 물었더니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湯(감꼭지 말린 것을 달인 물)을 쓰라해 먹고 나았다는 말을 듣는다. 임금의 증상이 오면서 봤던 아이와 같고, 지난 밤 훔쳐 본 의서에서도 시체탕에 관한 말이 있어 시체탕을 썼더니 바로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 유혹에 빠진 민중의 李獻吉

의원가문 출신이 아니었던 이헌길은 남몰래 ‘杜疹方’을 보고 공부했다. 영조 51년(1775) 한양에 갔다가 천연두가 돌아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상중이라는 이유로 돌아섰으나 이내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 모른체하는 것은 불인한 것”이라고 생각을 고치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헌길의 의술에 낫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따라서 그의 뒤에 수많은 환자가 몰렸다.
하지만 유혹에 빠진 이헌길, 그 요체는 다름 아닌 돈이었다. 돈을 받고 치료를 해주자는 욕심에 종적을 감췄던 이헌길은 이내 사람들이 몰려와 욕설을 퍼붓고 몽둥이를 들자 재빨리 사과하고 처방을 알려주었다. 물론 많은 환자가 치료됐다.

값 1만4천500원.

정리 =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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