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648] 正祖가 꿈꾼 무병장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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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648] 正祖가 꿈꾼 무병장수의 나라
  • 승인 2014.09.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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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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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衆新編」①
「제중신편」이야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히 아는 책이지만 대부분 그저 「동의보감」의 축약편 정도로 치부하고 있기 일쑤이다. 필자도 오래 전 이 코너를 시작하던 무렵에 ‘저승까지 侍從한 首醫 康命吉’이란 제목으로 이 책을 소개한 바가 있다.(제18회/ 1999년12월6일자)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기억도 희미할 뿐만 아니라 그간 이전에 미처 몰랐던 새로운 연구성과가 밝혀지게 된 것도 적지 않기에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제중신편」

이 일은 마침 경기도한의사회에서 역대의학인물조명사업 가운데 하나로 올해 康命吉을 조명하는 학술발표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참이어서 더욱 의의가 깊다. 영정조 시대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안정되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유독 의약분야에서 만큼은 1613년 임진전쟁을 겪은 직후에야 간행된 「동의보감」의 성가에 눌려 조선후기 의학은 볼만한 것이 없으며, 대부분 그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피상적인 선입견이 널리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러 분야 가운데 유독 의약학 분야에서만이 발전상이 없고 쇠퇴하였다는 것은 상식선에서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시 되새겨볼 일은 「제중신편」이 나오게 되는 동기와 과정이 비범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동궁이 되었던 젊은 시절의 정조는 오랜 기간 동안 할아버지인 영조임금을 모시면서 정사를 돌보는 수습기간을 거치게 되었다. 이때 연로하신 국왕을 돌보기 위해 몸소 어의인 康命吉로부터 「동의보감」을 비롯한 여러 의방서를 익혔다. 이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전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醫書를 탐독해 왔고, 병술년(1766, 영조42)에서 병신년(1776, 영조52)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선대왕의 간병으로 편히 띠를 풀고 잔 적이 없었으므로 脈訣과 藥性에 대하여 저절로 두루 알게 되었다.…”

정조임금은 강명길과의 학습과정을 통해 「동의보감」에 대한 장단점을 잘 인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요점만을 가려 친히 요약편을 꾸미는데, 이것이 바로 「壽民妙詮」이라는 책이다. 비록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진 않지만 그중 2권이 사본으로 전한다. 아마도 조선왕조를 통틀어 국왕이 직접 지은 유일한 의약전서가 아닐까 생각되며, 외국의 경우에도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의미가 있는 저작이라 하겠다.

정조는 보위에 오른 이후 젊어서 자신이 정리했던 원고를 찾았으나 이미 태반이 유실된 상태여서 원래의 모습을 복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쉬움을 달래고자 함께 의약을 연마했던 스승이자 어의인 강명길에게 자신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의서를 찬집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즉,「동의보감」내용 가운데 번잡한 것을 빼고 모자란 것을 보충(‘芟繁補漏’)하여 새로 집필하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정조는 특히 「동의보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표했는데, 정조의 개인문집인 「弘齋全書」속의 「群書標記」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타고난 체질은 고금의 차이가 있고, 東西의 風氣도 한결같지 않으므로, 역대의 醫書 가운데 진실로 우리나라에서 쓰기에 알맞은 책을 찾자면 陽平君 許浚이 지은「東醫寶鑑」만한 것이 없다. 다만「동의보감」은 病理와 處方을 논한 것이 서로 뒤섞여서 체례가 정연하지 못한 것이 흠이므로, 내가 그 체례를 일부 수정하고 그 중 精髓를 뽑아내고 또 湯液에 관한 여러 처방을 續編으로 엮어 따로 뒤에 붙이고, 「壽民妙詮」이라 명명하였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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